린의 첫 키스 상대는 그녀를 따르던 여종이었다.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예쁘장한 소녀였는데, 수줍음이 많은 린과는 달리 발칙한 성정이었다. 린은
그런 그녀의 성격을 싫어하지 않았다. 따로 불러서 맛있는 것을 챙겨주고, 서로 빗질을 해주기도 하며 사이좋게 어울렸었다. 린이 때때로 그녀를
예쁜 꽃 바라보듯이 지긋이 바라보고 있으면, 여종은 그 눈초리를 알아차리고 사랑스럽게 웃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세간의 눈을 피해 장난을 쳤다. 손을 잡고, 쓰다듬고. 그렇다고 둘이 없으면 못 사는 사이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린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많았다. 첫사랑 상대는
그녀에게 수 놓는 법을 가르치던 선생이었으며, 그녀를 가장 오래 두근거리게 한 여인은 이따금 만나서
어울리던 또래의 양갓집 규수였다. 린이 보기에 여인들은 하나 같이 예뻤다. 예쁘지 않은 여인이 없었다. 어떤 여인은 개나리처럼 어여쁘고, 어떤 여인은 나팔꽃처럼 어여쁘고, 민들레와 작약, 제비꽃과 창포꽃, 찔레와 목화….
모두 저마다의 매력이 있었다. 린은 사내보다 여인에게 설레는 사람이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고 하더라도 대답할 수가 없다. 그냥,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린이 조선을 떠나기로 한 날은 빗물이 세차게 떨어지는 날이었다. 소녀는
어른들이 내린 결정을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모범적인 조선의 여인이어서 가르침 받은 대로 싫은 내색을 내비치지는 않았으나, 린의 마음속은 울적하고 무거웠다. 그치지 않을 것처럼 쏟아지는 비는
익숙한 터전을 두고 떠나는 소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린이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집안의 풍경을
둘러보고 있는데 린이 사랑한 여종이 살그머니 다가왔다. 소녀들은 그렇게 부엌 앞 처마 밑에서 아무도
모르게 키스를 했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린은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린은 항구로 향하는 마차에서 창밖에 멀건 시선을 두고 내내 그 첫
키스를 곱씹었다. 그게 그녀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숨죽여 몰래 눈물을 쏟았었다. 네덜란드로 향하는 배를 타기 전에는 말끔히 얼굴을 정리하여 그 누구도
그녀가 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점은 드로스트 가문의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드로스트는 약하면 안 되었으므로.
린을 데리고 온 드로스트의 사내는 집안의 잡일을 맡는 자였는데, 의수를
달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었다. 그는 네덜란드로 향하는 배 안에서 린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드로스트 가문이 얼마나 크고 영향력 있는 가문인지, 가문의 명예를
얼마나 중히 여겨야 하는지, 가문에는 어떤 이들이 있는지.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생활하는 데에 유용한 지식도 있었지만 대부분 가문의 규칙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어떤 말이 끝날 때마다 이 사실은 외부에는 발설하면 안 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조선보다는 자유로운 곳이지만, 다른 의미로 조선에서 생활할 때보다
더욱 처신을 잘해야 할 거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기도 했다. 남자는 친절했지만 엄격한 사람이었다. 드로스트에 관한 린의 첫인상은 부유하며 비밀이 많은 가문이라는 인상이었다. 린
드로스트는 한껏 긴장한 채로 네덜란드에 발을 내디뎠다. 많은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예감이
어린 소녀의 머릿속을 흔들었다.
아이가 드로스트 가문의 본가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가장 먼저 반겨준
사람은 디아나 드로스트였다. 배 안에서 들은 바가 있었다. 재능
있는 자들을 후원하는 일을 맡은 드로스트 가문의 여식이었다.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향했다. 드로스트 가문의 저택은 어찌나 화려하고 넓은지, 린은 온통 반짝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샹들리에와 가구, 벽에 붙은 액자, 하다못해 창문과 지나다니는 하인들까지도 말끔하고 아름다웠다. 린은
그런 분위기에 조금 주눅이 든 채로 복도를 거닐었다. 응접실 문이 열렸고, 린은 디아나 드로스트를 마주할 수 있었다.
디아나 드로스트를 마주한 린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높이 솟은 이마, 깊게 팬 눈. 그런 이목구비와 금빛의 머리카락은 낯선데도 불구하고, 린은 디아나 드로스트라는 여인이 정말 어여쁘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와서 마주한 그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다웠다. 디아나 드로스트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멈춰 선
린에게 말을 붙였다. 반갑습니다, 린 양. 이곳이 어색하십니까? 편히 앉으시지요, 이제 저희는 서로 가족 되는 사이인걸요. 그렇게 말한 디아나 드로스트는
린이 이제껏 본 그 어떤 여인의 미소보다 어여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다. 린이 뒤늦게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디아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자, 디아나는 그녀에게 홍차를 권했다.
린은 얼떨떨한 마음으로 찻잔을 붙잡았다. 대화를 나누면서 덜컹 흔들렸던 마음은 차차 가라앉았다. 사랑에 빠지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디아나 드로스트는
한없이 친절한 사람이었다. 린은 앞으로 곤란한 일이 있거나 모르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자신을 찾아와도
좋다는 디아나의 말을 마음속에 품었다.
드로스트 가문에 관한 린의 첫인상은 틀리지 않았다. 드로스트 가문은
비밀이 많았다. 린 드로스트는 첫날 저택으로 들어선 이후로 한 번도 저택의 창살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나갈 수 없었다. 왜 나갈 수 없느냐고 물으면 가문의 일에 관한
보안 문제 때문이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배워야 할 것은 끝이 없었다. 매일 같이 귀족의 예법과 여러 나라의 언어를 배웠으며, 특히 염동력을
다루는 수업은 사정을 봐주는 일이 없었다. 드로스트 가문은 그녀가 정교한 컨트롤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녀를 다그치고 또 다그쳤다. 하지만, 지내는 형편은 조선에서
살았을 때보다 나았다. 조선에서도 잘 사는 집안의 아가씨로 나고 자랐음에도 그랬다. 지내는 방은 넓고, 갈아입을 옷이 수십 벌은 되었다. 때때로 린이 수업을 잘 따라올 때면, 화려한 장신구나 조선의 값진
물건들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린 나이대 아이들이라면 사양할 수 없을 만큼 예쁜 물건들이었다. 린에게 따라붙은 전속 하인도 셋이나 되었다. 셋. 지나친 숫자였다. 린은 자신이 항상 감시당하는 것 같다고 느꼈으나, 착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러려고 노력했다. 때때로 선물들이 그녀의 환심을 사려는 수단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었으나, 집을
떠나와서 불필요한 의심과 불안이 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린은 언제든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했던 디아나 드로스트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디아나 드로스트가 후원 파티를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린은 복도에서 디아나를 마주했다.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었던 첫날의 달콤한 이야기와 다르게 디아나 드로스트는 무척이나 바쁜 사람이어서, 이렇게 마주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마침 수업이 없어 쉬려고
했던 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디아나에게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함께 차를 마시는 건 어떻냐고
물었다. 디아나가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어디 기댈
데 없던 린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두 사람은 수업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디아나는 신기할 정도로 린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느냐고 묻자, 린은 드로스트 가문의 사람 중에서도 강력한 염동력을 가지고 있어서, 드로스트의 사람이라면 마땅히 알게 된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디아나는 린이 훗날 드로스트가를 뒷받칠 좋은 재목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좋은 재목이라는 말에 린은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린이 망설이면서 고민거리를 꺼냈다.
“디아나 님. 소녀는 언제쯤 저택을 나설 수 있을는지요?”
“린, 이곳은 답답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히 넓지 않습니까?”
디아나는 되려 린에게 반문한다. 그녀는 린이 아직 드로스트의 사람으로서
외부에 노출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드로스트는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린이 네덜란드에 온 이후로 수도 없이 들은 말이었으나, 디아나가
이야기하니 와닿는 느낌이 달랐다. 수업을 충실히 따라가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렇게 약속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드로스트 가문의 저택이 넓다고
한들, 몇 달째 갇혀 지내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새장이
크다고 새장이 아닐 수 있을까. 린 드로스트는 자신이 갇혀 지내고 있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린이 우물쭈물하고 있자, 디아나 드로스트가
말을 덧붙였다. 드로스트 가문의 교육에 어떠한 의심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상냥한 말씨였지만, 그녀는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사한 금발에 흰 피부, 붉은 입술. 디아나는 여전히 예쁜 모습이었고, 예쁜 입술로 격려를 늘어놓았다. 잘 적응할 수 있을 겁니다, 린.
제가 곁에서 돕고 있잖습니까? 디아나는 결국, 린을
북돋아 놓기는 했다. 린 드로스트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한 싸한 직감을 과한 불안이라고 치부하기로
했다. 디아나 드로스트에게 느낀 위화감은 착각이라고 믿기로 했다. 친절한
디아나의 말 따라 성실히 수업에 임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한동안 린은 드로스트의 수업에 성실히 임했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적어도 해내려고 의욕적으로 굴었다. 디아나의 조언을 따르니 일이
순탄하게 풀렸다.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가짐 문제였구나.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염동력 수업은 더욱 정교해져 갔다. 린은
이제 손을 쓰듯이 염동력으로 청소를 할 수도 있었고, 가위를 조종해 종이를 자를 수도 있었다. 디아나의 말대로 린의 염동력은 다른 드로스트들보다 강대한 편이었다. 큰
힘을 제어할 수 없다는 건 심리적으로 불행한 일이다. 조선에서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지냈던가. 자신도 모르게 능력을 쓸 때면, 해괴하고 망측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크게 혼이 나고는 했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러는 일이 없었다. 드로스트들은
되려 큰 힘을 가진 린을 장려하고 응원해주었다. 처음 느껴보는 성취감이었다. 그렇게 성과에 만족하던 때였다. 어느 날부터 염동력 수업에서는 작은
동물을 이용했다. 작은 동물이 다치지 않도록 띄우는 것부터 시작했었다.
염동력을 가르치는 선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물의 기본적인 골격과 해부학적 지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의아한 일이었지만, 린은 디아나의 조언따라 수업에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렇게 하려고 했다.
염동력으로 토끼의 목뼈를 비틀어 보세요. 린은 자신이 지시를 잘못
들었는지,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주변의 드로스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토끼의 목뼈를 비틀었다. 토끼들은
잠깐 기괴한 비명을 내질렀다가 공중에서 추욱 늘어진다. 그것들은 그래서는 안 되는 각도로 고개가 돌아가
있었다. 죽은 게 틀림없었다. 린 앞에 떠있는 토끼만이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것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선생도 마찬가지로 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떤 재촉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린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린이 능력을 적절히 사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 과정이 이상하지 않았다. 이상한
건 수업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비위 약한 린 드로스트였다. 린은 끝까지 해내지 못했고, 선생은 한숨을 쉬었다.
린은 따로 남아서 선생을 대면해야 했다. 선생은 그녀가 토끼를 죽이기
전까지는 방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동안 배운 해부학적 지식으로는 수십 가지 방법으로 작은 생명의 숨을 단숨에 끊어놓을 수 있었다. 염동력은
그럴 수 있는 능력이었다. 왜 이런 것을 배우는 것인가요? 린이
수없이 삼켰던 질문을 겨우 입 밖으로 내놓았다. 선생은 잠시 침묵하다가 단순한 호신술의 일환이라고 대답했다. 언젠가 반드시 치명적인 공격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론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요? 선생이 또다시 답한다. 순간의 망설임이
생사를 가를 것이며, 무언가를 죽인다는 결정에 미리 결심이 서 있어야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답변이었다. 그럴듯한 논리였다. 선생이 이런 질문이 익숙하다는 듯이 능숙하게
설명을 이어나간다. 드로스트라는 이름이 값진 만큼, 언제든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염동력이면 그들을 손쉽게 제압하여 곤란에 빠질 일이 없다고 했다. 그는 어딘가 우월감에 취해있었다. 린은 결국, 토끼의 목뼈를 비틀었다.
그녀가 죽여야 하는 동물은 점점 더 덩치가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은
토끼였으나, 이후로는 돼지가 되기도 했고, 사나운 맹수일
때도 있었다. 린은 토끼를 죽인 날부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으나, 수업을
못 따라가지는 않았다. 살아있는 것들을 훌륭하게 제압하고, 살아있지
않은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다 마침내는 인간을 마주하고야 말았다. 개인
교습 시간이었다. 끌려온 사람은 머리에 천으로 된 봉투를 쓰고 있었으나, 체격으로 보았을 때 사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단단히
포박된 채로 린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선생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린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저 할 일을 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린은 이 상황이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한참을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서 있자, 선생이 거들어주겠다는
듯이 입을 뗐다. 그자는 사형집행일이 어제였던 사형수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았다고 한들, 린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끝까지 가르침을 거부했다. 선생은
그녀가 거절할 때마다 드로스트의 교육을 의심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훈계했다. 린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선생은 그날 사형 집행을 포기해야만했다. 린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자신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살아남은 남자의 한숨 소리가 크게 들리는 듯했다.
그 한숨 소리는 린이 잠들 수 없도록 계속해서 그녀의 귓가를 맴돌았다. 벽시계는
한 시 반을 조금 넘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녀는 램프에 불을
붙이고, 방을 나섰다. 어떤 변덕이었다. 찬 공기를 마시든, 무엇이든. 그녀는
평소 하지 않던 일을 해서 주의를 환기하려고 했다. 하인을 대동하지 않고 복도를 거니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창가에는 창문을 통해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주변은 온통 고요했다. 린은 그런 적막으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온통 화려한 드로스트 가문의
저택이 어둠에 묻히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의심이 린의 가슴 속 어딘가에서 다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들이 관심이라고 했던 것들은
실은 감시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가로지르는데, 빛이 새어 나오는 방이 린의
눈에 띄었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방이었다. 아니,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는 표현이 맞는 방이었다. 린은 그 방이 열려있는
것이 의아하여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 같았다. 날카롭게 휘둘러지는 소리였다. 틈틈이 여자의 짧은 비명도 있었다. 목도한 것은 의미심장한 광경이었다.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았던 드로스트의 여식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무언가 줄 같이 늘어진 것으로 드러낸 등을 얻어맞고
있었다. 한 대, 두 대.
얻어맞을 때마다 여자는 몸을 다급히 들썩였으나, 곧 죽어가는 사람처럼 몸에 힘을 빼고 늘어져
버렸다. 많은 걸 포기한 사람 같았다. 린은 서둘러 시선을
옮겼다. 여인을 때리는 자는 누구인지 얼굴을 살폈다. 채찍질하고
있는 자는 드로스트에서 제법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였다. 여인은 그 중요하다던 가문의 규칙을
어긴 것일까. 린은 나서야 하는 것인지, 모른 척하고 자리를
떠야 하는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무엇을 하고 있나요?”
디아나 드로스트였다. 그녀는 늦은 시간임에도 단정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아직 일과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린은 화들짝
놀라서 황급히 몸을 뒤로 내뺐다. 바깥의 소란을 들은 드로스트의 사내가 무슨 일인지 알아볼 심산으로
방을 나섰다. 남자는 제일 먼저 린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나서는 디아나 드로스트를 본다. 그는 곧바로 표정을 펴고 바로 섰다.
두 사람은 린 드로스트만이 모르는 어떤 이야기를 눈으로 나누었다. 남자가 말한다. 알아서 처리할 거라고 믿소, 디아나 드로스트.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는 들고 있던 채찍을 바로 쥐면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번에는 방문이 단단히 닫혔다. 더는
안을 엿볼 수 없었다. 디아나 드로스트가 방문 앞을 막아서고 있기도 했다. 그녀가 대답을 바라는 듯이 린을 응시했다. 린이 겨우 말을 꺼냈다.
“잠이 오지 않는 탓에 밤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늦은 시간입니다, 린. 내일을 생각하셔야지요."
린은 순순히 들어가겠다고 말했고, 디아나는 그녀를 방문 앞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다. 두 사람이 복도를 걷는다. 린은 지난번처럼
디아나의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린이 무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디아나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린을 응시하지 않은 채로 걷고 있었다.
“수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디아나는 돌아가는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린은 대꾸하지
않는다. 가만히 디아나가 다음 말을 이어나가기를 기다렸다. 디아나는
린의 침묵을 인지하였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얼마 걷지 않아서 방문 앞에 도착했다. 디아나는 방문을 등지고 선 린의 앞에 똑바로 섰다. 그녀가 린의 잠옷에 달린 리본을 바로 매주면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삐뚤어진
리본이 풀린다. 느린 손끝을 따라서 리본이 새로 매여진다. 디아나는
부드러운 말씨로 린을 달랜다.
“드로스트의 모든 교육은 당신을 위한 겁니다. 당신은 아직 어리니,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수 있겠죠. 하지만, 드로스트의 사람이라면 모두 거쳐온 길입니다. 당신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드로스트는 스스로를 위험으로부터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디아나 드로스트는
린의 염동력 수업 선생과 마찬가지로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웠다. 디아나의 시선은 계속 린의 리본에 머물러
있었고, 린은 가만히 서서 자신의 목 근처에서 움직이는 디아나의 손을 응시했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좁았다. 린이 의식할 수밖에 없는 거리였다. 린이 디아나의 얼굴을 몰래 엿볼 생각으로 느리게 눈을 올렸다. 리본을
보고 있는 디아나의 얼굴을 살핀다. 긴 속눈썹과 오뚝한 코, 꼭
다물린 입술. 어여쁜 모습이었다. 혼란스러운 상황과 대비되어
이질적이었다. 린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디아나가 가까이
있기 때문인지, 드로스트 가문을 향한 의심을 들킨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인지. 린은 자신이 왜 긴장했는지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리본은 예쁘게
매여졌다. 디아나가 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면서 한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그녀가 린을 가만히 살핀다. 관찰하는 눈초리였다.
“그녀는 드로스트의 중요한 규율을 어겼습니다. 마땅히 체벌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규율인가요? 린은 그렇게 묻고 싶은 충동을 목 뒤로 삼켰다. 궁금한 동시에, 진실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다 괜찮을 거예요, 린. 그
말을 마지막으로 디아나가 방문을 열어주었다. 린이 방으로 들어섰고, 문이
닫혔다. 린은 그날 밤, 오랫동안 잠잘 수 없었다. 많은 생각과 얻어맞던 여인, 그리고 디아나 드로스트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그날 이후, 린의 수업은 폐쇄적으로 변했다. 그녀는 선생을 혼자서 대면해야 했다. 선생들은 하나 같이 린의 모습을
면밀히 살폈다. 그들은 린을 관찰하고 있었다. 또, 그녀의 일과에는 명상 시간이 생겼다. 염동력 수업 바로 이전에, 린은 명상실로 향한다. 명상을 돕는 드로스트의 사람은 린에게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드로스트의 사람이 되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드로스트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지. 그는 린이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생각하도록 유도했다. 명상실에는 항상 다기가 있었다. 차는
아주 효능이 좋았다. 명상실에서 우려낸 차를 마시면 린은 불안을 좀 덜어낼 수 있었다. 수업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어찌나 집중할 수 있는지, 린은 명상을 시작한 첫 번째 날, 그렇게 망설이던 일을 해냈다. 고민 없이 사형수의 목을 비틀었다. 선생은 린을 칭찬하였고, 린은 자신이 해냈다는 데에 기쁨을 느꼈다.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깊은 밤,
린은 문득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왜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을까. 그 당시 그녀는 드로스트의 교육이 틀릴 리 없다고 맹신했었다. 가문이
그녀를 위해 마련한 길을 의문 없이 따라갈 생각이었다. 왜,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드로스트에서 그녀에게 어떤 수를 쓴 게 분명했으나,
린은 그저 수를 썼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언제 수를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린을 휘두를 수 있었다. 린은 저지른
일을 후회하는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관해 두려워했다. 어떻게 그들을 저지할 수 있을까? 린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드로스트의 저택에 머무는 한에는
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린은 그제야 무언가 그녀를 얽매고 조여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심지어는 그녀를 격려하던 디아나 드로스트조차도. 디아나 드로스트의
격려가 린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디아나 드로스트는 린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무사히 드로스트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드로스트가 린을 관찰한 것처럼, 린 또한 드로스트를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드로스트 저택을몰래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수업 시간은 물론이었고, 그녀가 잠자는 시간, 쉬는 시간까지 전부, 매 순간 누군가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심지어 하인들은 그녀가 주변을
관찰하는 태도까지 알아차렸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더욱 은밀하게 린을 지켜보았다. 그런 시기도 오래가지 않았다. 방침이 바뀌었다. 모두는 린 드로스트를 노골적으로 감시하기 시작했다. 더는 숨기려고
들지도 않았다. 드로스트 가문은 린의 생각을 속속이 알고 있는 듯이 굴었다. 그리고 이제 린은, 염동력 수업에서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여 능숙하게
사람의 숨을 끊는다. 그렇게, 사형수를 처음 죽였던 날처럼
때때로 온전한 드로스트 가문의 사람이 되고는 했다. 자신을 잃고 있었다. 제정신을 차릴 때면,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몰래 바깥으로 편지를 부치기도 했으며, 도망치려는 시도도 해보았으나
의미 없는 저항으로 그치고 말았다.
린은 천성이 유순한 여인이었다. 언젠가 사내아이가 나뭇가지에 똬리를
튼 뱀을 코앞까지 가져다 댔을 때도, 반사적으로 몸을 보호했을 뿐, 아무도
다치게 하는 일이 없었다. 훈련받지 않은 능력자가 깜짝 놀랄 때면 으레 사람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나곤
한다는 걸, 사이퍼를 좀 가르쳐 본 자들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다. 린은
내성적이며 매사에 신중하다. 그래서 두려움이 그녀를 삼키고, 불안의
끝까지 내몰린 때에도 누군가를 해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린은 그녀의 방 한구석에 틀어박혀서 몸을 웅크렸다. 누군가 바로 옆에서 그녀를 불러도 듣지 못했고, 손을 대려고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염동력으로 다가온 이를 밀어냈다. 식사도 하지 않고, 제대로 된 잠도 자지 않고 그렇게 이틀을 있었다. 린과 친분이 있었던
드로스트의 사람들이 다섯은 왔다 갔으나, 린의 불안은 가시지를 않았다.
그리고, 디아나 드로스트가 린을 찾아왔다. 그녀는
바쁜 일과 중에 시간을 낸 것인지, 좌우로 사람을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드로스트 가문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라면, 디아나 드로스트는 그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없는 위치에 있었으나, 두
사람은 자리를 비켜달라는 디아나의 말에 정중히 물러났다. 린은 멍한 시선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인으로부터 물 한 잔을 받아든 디아나가 린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는다.
“린, 기운을 좀 차리세요.”
“…….”
린과 디아나의 시선이 맞닿았다. 침묵이 흐른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린이 입술을 떼었다.
“디아나 님, 일전에 제가 보았던 여인은 어떻게 되었는지요?”
디아나는 린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누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사형수를 죽이지 못했던 밤, 열린 문 사이로 엿보았던 매 맞는 여인이었다. 매 맞던 여인은 그날 이후, 드로스트 저택 그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드로스트 저택을 유심히 관찰하던 린은 그녀가 실종되었으며, 모두가
그녀를 없던 사람처럼 취급한다는 걸 알아차렸었다. 디아나는 어떠한 감정도 실리지 않은 얼굴을 하고 린에게
진실을 속삭인다.
“그녀는 드로스트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자유로워졌지요. 이후의 일은 모를 일입니다.”
“소녀도 곧 그렇게 되옵니까?”
“그렇지 않아요. 저는 당신이 그녀와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어요.”
디아나가 린의 양손을 부드럽게 붙잡는다. 린의 손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린이 쓰게 웃는다. 이제 린은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몬 배후가 디아나
드로스트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디아나가 린에게 물 컵을 쥐여주면서 말한다. 제가 당신을 돕겠습니다. 물을 들도록 하세요. 린은 한참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디아나 드로스트는 이런 순간에서조차
어여삐 보인다는 게 린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린이 시선을 물 잔으로 옮겼다. 받아들인다면,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느리게 말라 있던 목을 축인다. 그리고 천천히 무의식으로 빠져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완전히 잠에 빠졌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린을 침대에
눕히고 디아나를 응시했다. 디아나가 옷을 추스르면서 하인에게 지시한다.
이걸로 당장에 며칠은 정신을 차리고 있을 겁니다, 수업을 계속 진행하세요. 그리고… 아돌프 박사에게 이번에는 정신 교육이 필요한 아이가 있다고
전하세요. 하인이 알아들었다는 뜻에서 허리를 숙였다.
며칠 후, 린은 원하던 대로 드로스트 저택을 벗어날 수 있었다. 열흘이 지났다. 드로스트 저택으로 돌아온 린은 더는 심한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다. 또, 많은 것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무엇보다 조선에서 지냈던 기억이 흐렸다. 분명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추억이 있었는데,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드로스트
가문에서는 이제 린을 반듯이 장기 말처럼 다룰 수 있었다. 린은 이제 거부하지 않는다. 거절하지 않는다. 이따금 거부감을 가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가문이 정해둔 수업을 꼬박 들었다. 저항은 의미 없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품고 있는 거부감는 앞으로도 문제가 될 일이 없을 것이다. 디아나는 린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약간의
격려와 약간의 친절, 약간의 접촉. 보상 같은 거였다. 그때마다 린의 마음이 설레고, 머릿속이 뒤흔들렸다. 린에게 디아나 드로스트는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더는 그녀의 존재에 저항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린은 드로스트 저택을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목이 꺾여 죽었다. 디아나는 저택으로 돌아온 린에게
이제 온전한 드로스트의 사람이 되었다고 칭찬하였다. 린이 디아나에게 입을 맞춘다. 다급하면서도 조심스러운 키스였다. 디아나는 린의 그런 표현을 거절하지
않았다. 디아나 님은 이곳도 예쁘시옵고…, 이곳도 예쁘시옵고…. 린의 입술이 디아나의 곳곳에 닿는다. 린에게 디아나 드로스트는
아름답지만 위험한 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