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었다. 또 악몽이었다. 나는 어느 날부터 악몽을 꾸는 일이 잦았다. 침대에서 일어서자니 흥분한 벌레들이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근방에 있는 벌레란 벌레들은 전부 모였을 것이다. 신경질적으로 손짓하여 그것들을 전부 치웠다. 동시에 몸 안에서 들끓던 벌레들도 가라앉았다. 창가로 걸었다. 커튼이 조금 걷힌 창가에서는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내려다본 거리엔 아무도 없다. 커튼을 완전히 쳐버리고 침대 옆 전등을 켰다. 테이블 위에는 진정제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진정제 하나를 삼켰다. 물 컵을 내려놓으면서 의자에 주저앉는다.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머리를 비우고 테이블 아래에 시선을 두었다.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끓는 감정이 차오른다. 벌레들이 다시 울기 시작한다. 옛 친구에 관한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생각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다시 잠에 들 수 없을 것이다.

 

이 지독한 감정은 유년기부터 시작되었다. 내 유년 시절은 불우했다. 거리의 아이들은 거칠었으며 때로는 아이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었다. 나는,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어쩌면 평생 모르고 지낼 잔인한 진실들을 일찍 마주했다. 힘 있는 자에게 굴복하는 법을 배웠고 약한 자에게 악하게 구는 법을 배웠다. 잔인한 환경에서 헤맬 때부터 한 자리 잡을 때까지. 곁에는 내내 까미유 데샹이 있었다. 끔찍한 일과 소소한 기쁨을 함께 누렸다. 서로에 관해서 모르는 게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까미유 데샹은 내게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된 것이 까미유의 의도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까미유는 나와는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친구였다. 지내온 환경이 같으니 속내까지 부드럽지는 않더라도, 나라면 주먹다짐으로 해결했을 문제를 부드럽게 해결하여 모두에게 환심을 샀다. 상황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똑똑한 친구이기에 나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내가 누군가를 다치게 한다면 까미유는 누군가의 통증을 덜어낸다. 나는 그런 까미유 데샹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결국, 까미유도 카모라의 사람이다. 까미유 데샹은 그렇게 계속 내 곁에 있었다. 미래에도 그럴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친구의 꿈은 더 먼 곳에 있었다. 나는 그와 오랜 세월을 함께 했으므로 그 야망을 아주 모르지 않았으나 마침내는 저 혼자 남겨지는 상황을 알지는 않았다. 이제는 오랜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다. 붙잡고 있는 사람은 저뿐이다.

 

관계를 저버린 것은 분명 까미유의 의지였다. 그렇다면 분노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나는 까미유 데샹을 사랑하므로 그를 진심으로 미워하지 못 한다. 그럴 수 있을 관계였다면 애초에 쉽게 식어버릴 분노였을 것이다. 내 분노는 까미유와 뜻을 함께한 자들에게 향한다. 어둠의 능력자, 윌라드 크루그먼, 안타리우스…. 친구를 변하게 한 야망이 싫었다. 그 야망과 손잡은 자들이 경멸스러웠다. 그냥 묻어버리기에는 저가 잃어버린 것이 너무나 크다. 나는 이제껏 자라면서 배웠던 대로, 적어도 잃은 만큼은 누군가에게 되돌려주어야 했다. 반드시 복수해야 했다. 최근에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 생각 하나로 움직였으며 어떤 일을 결정했다. 제 친우였던 까미유 데샹은 친구가 복수를 계획할 것이라 예상했을까. 어떤 지독한 감정에 사로잡혀 지낼 것이라 짐작했을까. 나는 그가 떠나리라고 예상치 못 했는데 말이다. 그 머리 좋은 친구는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을까. 내가 그리고 있는 미래는 분명했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예전처럼 다시 까미유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모든 생각이 정리되었다. 이미 알고 있던 결론이었다. 약 기운이 돌았는지 벌레들도 잠잠했다. 침대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좋은 꿈을 꾸지 못 할 거라는 예감이 든다. 깨어난다 하더라도 즐거운 하루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복수심에 눈멀어 있기에. 내가 까미유 데샹을 사랑하기에. 나는 네가 떠나고부터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너 또한 떠나고 나서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런 너를 사랑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너를.

 

거듭 태어나 너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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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메에리웨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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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비아는 이어지는 갈등에 지쳤다. 언제 세 번째 전쟁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헬리오스와 지하 연합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싸움에 끼어서 한 몫 챙기려고 드는 비능력자 세력도 무시할 수 없었으며, 그런 와중에 안타리우스 세력도 있었다. 트리비아는 능력자 사회에서 크게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오래된 연합의 일원으로서, 뛰어난 전투 요원으로서, 트리비아 카리나는 연합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원체 말수가 많지 않고 사람과 어울리는 걸 꺼리는 탓에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데에 불만이 컸다. 트리비아 카리나는 예부터 어딘가에 얽매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걸고 있는 기대는 그녀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새로운 세계를 찾는 데에 몰두했다. 트와일라잇과 같은 도시가 또 있다면, 그곳을 찾아낸다면, 그녀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적적함을 달래줄 몇몇 친구와 함께 도망갈 계획이었다. 트리비아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어떻게든 그런 곳을 찾아낼 작정이었다. 목매었다.

 

루이스는 연합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어떤 자리에서는 연합의 수장인 앤지 헌트보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낱 서점 직원일 뿐이었던 그는 이제 영웅이라는 수식을 짊어졌다. 그 수식을 버겁게 여기던 때도 있었으나, 그는 너무 오랫동안 얼떨떨해하지는 않았다. 변화한 자신의 길을 받아들였다. 그는 뒤바뀐 환경에 부적응하기에는 머리가 차가운 사람이었다. 충분히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더는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모두가 루이스의 드라마틱한 이야기와 쓸모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의 외로움을 발견한 건 트리비아 카리나였다. 그의 외로움은 트리비아의 외로움과 닮아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 거리낌 없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트리비아는 루이스가 연합에 적응할 수 있도록 성실히 도왔고, 루이스는 훌륭하게 연합의 일원으로 자리 잡았다. 트리비아가 없었다면, 루이스는 많은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이었다.

 

루이스는 연합 내에서 진실한 친구를 사귀었으며, 먹고 살려고 가입한 곳에 불과했던 연합이라는 단체 자체에 정을 붙였다. 연합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들에게는 루이스가 없어서는 안 됐다. 날이 갈수록 연합의 형편은 나빠지고 있었다. 최근만 해도 헬리오스와는 다르게 마피아 같은 뒷세계의 사람들이 연관된 것이 문제가 되어 평판이 추락했었다. 그나마 없는 이들을 대변한다는 일말의 이미지가, 드라마틱한 역사가 그들을 지지했다. 연합의 모두는 그저 더는 나쁜 소식이 없기를 바라고 있을 때였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루이스는 연합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전쟁이 터진다고 해도 마땅히 위험을 감수할 작정이었다. 트리비아를 포함한,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 점이 문제가 되었다. 연합을 대표하는 연인은 싸우는 일이 늘었다. 트리비아는 루이스와 함께 위험도, 문제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트리비아 카리나가 연합에 기여한 공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다. 겨우 일이 년 중요한 일을 맡아온 루이스와는 다르게, 그녀는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능력자 사회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래서 루이스가 가려는 길의 무게와 위험을 잘 알았다. 길에서 탈선하는 건 한순간이야. 트리비아는 사람이 죽는 것은 한순간이며,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루이스를 설득하려고 들었다. 그건 루이스에게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다른 동료들에게도 해당되는 가정이지만, 그는 특히 트리비아를 잃고 싶지 않았다. 전쟁 통에 그녀를 잃는다면 그 부정함을 견뎌낼 수 있을까.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연합을 저버릴 수도 없었다. 루이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강제됐다. 트리비아의 제안대로 그녀와 함께 도망치든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과 무거운 책임을 계속 지든가. 두 사람의 이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오갔다.

 

어느 순간부터 루이스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트리비아가 그를 설득하려는 걸 포기하려 할수록 그랬다. 트리비아가 말없이 자리를 비우는 횟수가 점점 늘었다. 어느 날, 루이스는 동료를 통해서 트리비아가 새로운 액자에 관한 단서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기까지 했다. 루이스는 최악의 경우, 트리비아가 혼자서 어디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연인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루이스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루이스는 트리비아가 끝내 그를 떠나가려고 한다면, 결국, 그녀를 선택할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루이스는 다른 문제를 고민해야 했다. 그는 자신과 연인의 빈 자리가 부디 연합을 크게 흔들지 않길 바랐다. 영웅을 희망하는 새로운 자가 자신을 대체할 수 있길 바랐다.


Posted by 메에리웨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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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의 첫 키스 상대는 그녀를 따르던 여종이었다.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예쁘장한 소녀였는데, 수줍음이 많은 린과는 달리 발칙한 성정이었다. 린은 그런 그녀의 성격을 싫어하지 않았다. 따로 불러서 맛있는 것을 챙겨주고, 서로 빗질을 해주기도 하며 사이좋게 어울렸었다. 린이 때때로 그녀를 예쁜 꽃 바라보듯이 지긋이 바라보고 있으면, 여종은 그 눈초리를 알아차리고 사랑스럽게 웃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세간의 눈을 피해 장난을 쳤다. 손을 잡고, 쓰다듬고. 그렇다고 둘이 없으면 못 사는 사이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린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많았다. 첫사랑 상대는 그녀에게 수 놓는 법을 가르치던 선생이었으며, 그녀를 가장 오래 두근거리게 한 여인은 이따금 만나서 어울리던 또래의 양갓집 규수였다. 린이 보기에 여인들은 하나 같이 예뻤다. 예쁘지 않은 여인이 없었다. 어떤 여인은 개나리처럼 어여쁘고, 어떤 여인은 나팔꽃처럼 어여쁘고, 민들레와 작약, 제비꽃과 창포꽃, 찔레와 목화…. 모두 저마다의 매력이 있었다. 린은 사내보다 여인에게 설레는 사람이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고 하더라도 대답할 수가 없다. 그냥,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린이 조선을 떠나기로 한 날은 빗물이 세차게 떨어지는 날이었다. 소녀는 어른들이 내린 결정을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모범적인 조선의 여인이어서 가르침 받은 대로 싫은 내색을 내비치지는 않았으나, 린의 마음속은 울적하고 무거웠다. 그치지 않을 것처럼 쏟아지는 비는 익숙한 터전을 두고 떠나는 소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린이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집안의 풍경을 둘러보고 있는데 린이 사랑한 여종이 살그머니 다가왔다. 소녀들은 그렇게 부엌 앞 처마 밑에서 아무도 모르게 키스를 했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린은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린은 항구로 향하는 마차에서 창밖에 멀건 시선을 두고 내내 그 첫 키스를 곱씹었다. 그게 그녀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숨죽여 몰래 눈물을 쏟았었다. 네덜란드로 향하는 배를 타기 전에는 말끔히 얼굴을 정리하여 그 누구도 그녀가 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점은 드로스트 가문의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드로스트는 약하면 안 되었으므로.

 

린을 데리고 온 드로스트의 사내는 집안의 잡일을 맡는 자였는데, 의수를 달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었다. 그는 네덜란드로 향하는 배 안에서 린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드로스트 가문이 얼마나 크고 영향력 있는 가문인지, 가문의 명예를 얼마나 중히 여겨야 하는지, 가문에는 어떤 이들이 있는지.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생활하는 데에 유용한 지식도 있었지만 대부분 가문의 규칙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어떤 말이 끝날 때마다 이 사실은 외부에는 발설하면 안 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조선보다는 자유로운 곳이지만, 다른 의미로 조선에서 생활할 때보다 더욱 처신을 잘해야 할 거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기도 했다. 남자는 친절했지만 엄격한 사람이었다. 드로스트에 관한 린의 첫인상은 부유하며 비밀이 많은 가문이라는 인상이었다. 린 드로스트는 한껏 긴장한 채로 네덜란드에 발을 내디뎠다. 많은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예감이 어린 소녀의 머릿속을 흔들었다.

 

아이가 드로스트 가문의 본가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가장 먼저 반겨준 사람은 디아나 드로스트였다. 배 안에서 들은 바가 있었다. 재능 있는 자들을 후원하는 일을 맡은 드로스트 가문의 여식이었다.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향했다. 드로스트 가문의 저택은 어찌나 화려하고 넓은지, 린은 온통 반짝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샹들리에와 가구, 벽에 붙은 액자, 하다못해 창문과 지나다니는 하인들까지도 말끔하고 아름다웠다. 린은 그런 분위기에 조금 주눅이 든 채로 복도를 거닐었다. 응접실 문이 열렸고, 린은 디아나 드로스트를 마주할 수 있었다.

 

디아나 드로스트를 마주한 린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높이 솟은 이마, 깊게 팬 눈. 그런 이목구비와 금빛의 머리카락은 낯선데도 불구하고, 린은 디아나 드로스트라는 여인이 정말 어여쁘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와서 마주한 그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다웠다. 디아나 드로스트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멈춰 선 린에게 말을 붙였다. 반갑습니다, 린 양. 이곳이 어색하십니까? 편히 앉으시지요, 이제 저희는 서로 가족 되는 사이인걸요. 그렇게 말한 디아나 드로스트는 린이 이제껏 본 그 어떤 여인의 미소보다 어여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다. 린이 뒤늦게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디아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자, 디아나는 그녀에게 홍차를 권했다. 린은 얼떨떨한 마음으로 찻잔을 붙잡았다. 대화를 나누면서 덜컹 흔들렸던 마음은 차차 가라앉았다. 사랑에 빠지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디아나 드로스트는 한없이 친절한 사람이었다. 린은 앞으로 곤란한 일이 있거나 모르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자신을 찾아와도 좋다는 디아나의 말을 마음속에 품었다.

 

드로스트 가문에 관한 린의 첫인상은 틀리지 않았다. 드로스트 가문은 비밀이 많았다. 린 드로스트는 첫날 저택으로 들어선 이후로 한 번도 저택의 창살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나갈 수 없었다. 왜 나갈 수 없느냐고 물으면 가문의 일에 관한 보안 문제 때문이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배워야 할 것은 끝이 없었다. 매일 같이 귀족의 예법과 여러 나라의 언어를 배웠으며, 특히 염동력을 다루는 수업은 사정을 봐주는 일이 없었다. 드로스트 가문은 그녀가 정교한 컨트롤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녀를 다그치고 또 다그쳤다. 하지만, 지내는 형편은 조선에서 살았을 때보다 나았다. 조선에서도 잘 사는 집안의 아가씨로 나고 자랐음에도 그랬다. 지내는 방은 넓고, 갈아입을 옷이 수십 벌은 되었다. 때때로 린이 수업을 잘 따라올 때면, 화려한 장신구나 조선의 값진 물건들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린 나이대 아이들이라면 사양할 수 없을 만큼 예쁜 물건들이었다. 린에게 따라붙은 전속 하인도 셋이나 되었다. . 지나친 숫자였다. 린은 자신이 항상 감시당하는 것 같다고 느꼈으나, 착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러려고 노력했다. 때때로 선물들이 그녀의 환심을 사려는 수단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었으나, 집을 떠나와서 불필요한 의심과 불안이 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린은 언제든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했던 디아나 드로스트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디아나 드로스트가 후원 파티를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린은 복도에서 디아나를 마주했다.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었던 첫날의 달콤한 이야기와 다르게 디아나 드로스트는 무척이나 바쁜 사람이어서, 이렇게 마주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마침 수업이 없어 쉬려고 했던 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디아나에게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함께 차를 마시는 건 어떻냐고 물었다. 디아나가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어디 기댈 데 없던 린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두 사람은 수업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디아나는 신기할 정도로 린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느냐고 묻자, 린은 드로스트 가문의 사람 중에서도 강력한 염동력을 가지고 있어서, 드로스트의 사람이라면 마땅히 알게 된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디아나는 린이 훗날 드로스트가를 뒷받칠 좋은 재목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좋은 재목이라는 말에 린은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린이 망설이면서 고민거리를 꺼냈다.

 

“디아나 님. 소녀는 언제쯤 저택을 나설 수 있을는지요?”

“린, 이곳은 답답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히 넓지 않습니까?”

 

디아나는 되려 린에게 반문한다. 그녀는 린이 아직 드로스트의 사람으로서 외부에 노출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드로스트는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린이 네덜란드에 온 이후로 수도 없이 들은 말이었으나, 디아나가 이야기하니 와닿는 느낌이 달랐다. 수업을 충실히 따라가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렇게 약속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드로스트 가문의 저택이 넓다고 한들, 몇 달째 갇혀 지내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새장이 크다고 새장이 아닐 수 있을까. 린 드로스트는 자신이 갇혀 지내고 있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린이 우물쭈물하고 있자, 디아나 드로스트가 말을 덧붙였다. 드로스트 가문의 교육에 어떠한 의심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상냥한 말씨였지만, 그녀는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사한 금발에 흰 피부, 붉은 입술. 디아나는 여전히 예쁜 모습이었고, 예쁜 입술로 격려를 늘어놓았다. 잘 적응할 수 있을 겁니다, . 제가 곁에서 돕고 있잖습니까? 디아나는 결국, 린을 북돋아 놓기는 했다. 린 드로스트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한 싸한 직감을 과한 불안이라고 치부하기로 했다. 디아나 드로스트에게 느낀 위화감은 착각이라고 믿기로 했다. 친절한 디아나의 말 따라 성실히 수업에 임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한동안 린은 드로스트의 수업에 성실히 임했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적어도 해내려고 의욕적으로 굴었다. 디아나의 조언을 따르니 일이 순탄하게 풀렸다.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가짐 문제였구나.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염동력 수업은 더욱 정교해져 갔다. 린은 이제 손을 쓰듯이 염동력으로 청소를 할 수도 있었고, 가위를 조종해 종이를 자를 수도 있었다. 디아나의 말대로 린의 염동력은 다른 드로스트들보다 강대한 편이었다. 큰 힘을 제어할 수 없다는 건 심리적으로 불행한 일이다. 조선에서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지냈던가. 자신도 모르게 능력을 쓸 때면, 해괴하고 망측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크게 혼이 나고는 했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러는 일이 없었다. 드로스트들은 되려 큰 힘을 가진 린을 장려하고 응원해주었다. 처음 느껴보는 성취감이었다. 그렇게 성과에 만족하던 때였다. 어느 날부터 염동력 수업에서는 작은 동물을 이용했다. 작은 동물이 다치지 않도록 띄우는 것부터 시작했었다. 염동력을 가르치는 선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물의 기본적인 골격과 해부학적 지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의아한 일이었지만, 린은 디아나의 조언따라 수업에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렇게 하려고 했다.

 

염동력으로 토끼의 목뼈를 비틀어 보세요. 린은 자신이 지시를 잘못 들었는지,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주변의 드로스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토끼의 목뼈를 비틀었다. 토끼들은 잠깐 기괴한 비명을 내질렀다가 공중에서 추욱 늘어진다. 그것들은 그래서는 안 되는 각도로 고개가 돌아가 있었다. 죽은 게 틀림없었다. 린 앞에 떠있는 토끼만이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것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선생도 마찬가지로 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떤 재촉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린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린이 능력을 적절히 사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 과정이 이상하지 않았다. 이상한 건 수업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비위 약한 린 드로스트였다. 린은 끝까지 해내지 못했고, 선생은 한숨을 쉬었다.

 

린은 따로 남아서 선생을 대면해야 했다. 선생은 그녀가 토끼를 죽이기 전까지는 방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동안 배운 해부학적 지식으로는 수십 가지 방법으로 작은 생명의 숨을 단숨에 끊어놓을 수 있었다. 염동력은 그럴 수 있는 능력이었다. 왜 이런 것을 배우는 것인가요? 린이 수없이 삼켰던 질문을 겨우 입 밖으로 내놓았다. 선생은 잠시 침묵하다가 단순한 호신술의 일환이라고 대답했다. 언젠가 반드시 치명적인 공격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론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요? 선생이 또다시 답한다. 순간의 망설임이 생사를 가를 것이며, 무언가를 죽인다는 결정에 미리 결심이 서 있어야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답변이었다. 그럴듯한 논리였다. 선생이 이런 질문이 익숙하다는 듯이 능숙하게 설명을 이어나간다. 드로스트라는 이름이 값진 만큼, 언제든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염동력이면 그들을 손쉽게 제압하여 곤란에 빠질 일이 없다고 했다. 그는 어딘가 우월감에 취해있었다. 린은 결국, 토끼의 목뼈를 비틀었다.

그녀가 죽여야 하는 동물은 점점 더 덩치가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은 토끼였으나, 이후로는 돼지가 되기도 했고, 사나운 맹수일 때도 있었다. 린은 토끼를 죽인 날부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으나, 수업을 못 따라가지는 않았다. 살아있는 것들을 훌륭하게 제압하고, 살아있지 않은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다 마침내는 인간을 마주하고야 말았다. 개인 교습 시간이었다. 끌려온 사람은 머리에 천으로 된 봉투를 쓰고 있었으나, 체격으로 보았을 때 사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단단히 포박된 채로 린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선생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린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저 할 일을 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린은 이 상황이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한참을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서 있자, 선생이 거들어주겠다는 듯이 입을 뗐다. 그자는 사형집행일이 어제였던 사형수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았다고 한들, 린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끝까지 가르침을 거부했다. 선생은 그녀가 거절할 때마다 드로스트의 교육을 의심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훈계했다. 린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선생은 그날 사형 집행을 포기해야만했다. 린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자신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살아남은 남자의 한숨 소리가 크게 들리는 듯했다.

 

그 한숨 소리는 린이 잠들 수 없도록 계속해서 그녀의 귓가를 맴돌았다. 벽시계는 한 시 반을 조금 넘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녀는 램프에 불을 붙이고, 방을 나섰다. 어떤 변덕이었다. 찬 공기를 마시든, 무엇이든. 그녀는 평소 하지 않던 일을 해서 주의를 환기하려고 했다. 하인을 대동하지 않고 복도를 거니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창가에는 창문을 통해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주변은 온통 고요했다. 린은 그런 적막으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온통 화려한 드로스트 가문의 저택이 어둠에 묻히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의심이 린의 가슴 속 어딘가에서 다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들이 관심이라고 했던 것들은 실은 감시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가로지르는데, 빛이 새어 나오는 방이 린의 눈에 띄었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방이었다. 아니,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는 표현이 맞는 방이었다. 린은 그 방이 열려있는 것이 의아하여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 같았다. 날카롭게 휘둘러지는 소리였다. 틈틈이 여자의 짧은 비명도 있었다. 목도한 것은 의미심장한 광경이었다.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았던 드로스트의 여식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무언가 줄 같이 늘어진 것으로 드러낸 등을 얻어맞고 있었다. 한 대, 두 대. 얻어맞을 때마다 여자는 몸을 다급히 들썩였으나, 곧 죽어가는 사람처럼 몸에 힘을 빼고 늘어져 버렸다. 많은 걸 포기한 사람 같았다. 린은 서둘러 시선을 옮겼다. 여인을 때리는 자는 누구인지 얼굴을 살폈다. 채찍질하고 있는 자는 드로스트에서 제법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였다. 여인은 그 중요하다던 가문의 규칙을 어긴 것일까. 린은 나서야 하는 것인지, 모른 척하고 자리를 떠야 하는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무엇을 하고 있나요?”

 

디아나 드로스트였다. 그녀는 늦은 시간임에도 단정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아직 일과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린은 화들짝 놀라서 황급히 몸을 뒤로 내뺐다. 바깥의 소란을 들은 드로스트의 사내가 무슨 일인지 알아볼 심산으로 방을 나섰다. 남자는 제일 먼저 린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나서는 디아나 드로스트를 본다. 그는 곧바로 표정을 펴고 바로 섰다. 두 사람은 린 드로스트만이 모르는 어떤 이야기를 눈으로 나누었다. 남자가 말한다. 알아서 처리할 거라고 믿소, 디아나 드로스트.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는 들고 있던 채찍을 바로 쥐면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번에는 방문이 단단히 닫혔다. 더는 안을 엿볼 수 없었다. 디아나 드로스트가 방문 앞을 막아서고 있기도 했다. 그녀가 대답을 바라는 듯이 린을 응시했다. 린이 겨우 말을 꺼냈다.

 

“잠이 오지 않는 탓에 밤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늦은 시간입니다, . 내일을 생각하셔야지요."

 

린은 순순히 들어가겠다고 말했고, 디아나는 그녀를 방문 앞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다. 두 사람이 복도를 걷는다. 린은 지난번처럼 디아나의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린이 무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디아나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린을 응시하지 않은 채로 걷고 있었다.

 

“수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디아나는 돌아가는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린은 대꾸하지 않는다. 가만히 디아나가 다음 말을 이어나가기를 기다렸다. 디아나는 린의 침묵을 인지하였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얼마 걷지 않아서 방문 앞에 도착했다. 디아나는 방문을 등지고 선 린의 앞에 똑바로 섰다. 그녀가 린의 잠옷에 달린 리본을 바로 매주면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삐뚤어진 리본이 풀린다. 느린 손끝을 따라서 리본이 새로 매여진다. 디아나는 부드러운 말씨로 린을 달랜다.

 

“드로스트의 모든 교육은 당신을 위한 겁니다. 당신은 아직 어리니,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수 있겠죠. 하지만, 드로스트의 사람이라면 모두 거쳐온 길입니다. 당신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드로스트는 스스로를 위험으로부터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디아나 드로스트는 린의 염동력 수업 선생과 마찬가지로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웠다. 디아나의 시선은 계속 린의 리본에 머물러 있었고, 린은 가만히 서서 자신의 목 근처에서 움직이는 디아나의 손을 응시했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좁았다. 린이 의식할 수밖에 없는 거리였다. 린이 디아나의 얼굴을 몰래 엿볼 생각으로 느리게 눈을 올렸다. 리본을 보고 있는 디아나의 얼굴을 살핀다. 긴 속눈썹과 오뚝한 코, 꼭 다물린 입술. 어여쁜 모습이었다. 혼란스러운 상황과 대비되어 이질적이었다. 린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디아나가 가까이 있기 때문인지, 드로스트 가문을 향한 의심을 들킨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인지. 린은 자신이 왜 긴장했는지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리본은 예쁘게 매여졌다. 디아나가 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면서 한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그녀가 린을 가만히 살핀다. 관찰하는 눈초리였다.

 

“그녀는 드로스트의 중요한 규율을 어겼습니다. 마땅히 체벌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규율인가요? 린은 그렇게 묻고 싶은 충동을 목 뒤로 삼켰다. 궁금한 동시에, 진실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다 괜찮을 거예요, . 그 말을 마지막으로 디아나가 방문을 열어주었다. 린이 방으로 들어섰고, 문이 닫혔다. 린은 그날 밤, 오랫동안 잠잘 수 없었다. 많은 생각과 얻어맞던 여인, 그리고 디아나 드로스트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그날 이후, 린의 수업은 폐쇄적으로 변했다. 그녀는 선생을 혼자서 대면해야 했다. 선생들은 하나 같이 린의 모습을 면밀히 살폈다. 그들은 린을 관찰하고 있었다. , 그녀의 일과에는 명상 시간이 생겼다. 염동력 수업 바로 이전에, 린은 명상실로 향한다. 명상을 돕는 드로스트의 사람은 린에게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드로스트의 사람이 되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드로스트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지. 그는 린이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생각하도록 유도했다. 명상실에는 항상 다기가 있었다. 차는 아주 효능이 좋았다. 명상실에서 우려낸 차를 마시면 린은 불안을 좀 덜어낼 수 있었다. 수업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어찌나 집중할 수 있는지, 린은 명상을 시작한 첫 번째 날, 그렇게 망설이던 일을 해냈다. 고민 없이 사형수의 목을 비틀었다. 선생은 린을 칭찬하였고, 린은 자신이 해냈다는 데에 기쁨을 느꼈다.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깊은 밤, 린은 문득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왜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을까. 그 당시 그녀는 드로스트의 교육이 틀릴 리 없다고 맹신했었다. 가문이 그녀를 위해 마련한 길을 의문 없이 따라갈 생각이었다. ,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드로스트에서 그녀에게 어떤 수를 쓴 게 분명했으나, 린은 그저 수를 썼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언제 수를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린을 휘두를 수 있었다. 린은 저지른 일을 후회하는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관해 두려워했다. 어떻게 그들을 저지할 수 있을까? 린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드로스트의 저택에 머무는 한에는 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린은 그제야 무언가 그녀를 얽매고 조여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심지어는 그녀를 격려하던 디아나 드로스트조차도. 디아나 드로스트의 격려가 린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디아나 드로스트는 린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무사히 드로스트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드로스트가 린을 관찰한 것처럼, 린 또한 드로스트를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드로스트 저택을몰래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수업 시간은 물론이었고, 그녀가 잠자는 시간, 쉬는 시간까지 전부, 매 순간 누군가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심지어 하인들은 그녀가 주변을 관찰하는 태도까지 알아차렸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더욱 은밀하게 린을 지켜보았다. 그런 시기도 오래가지 않았다. 방침이 바뀌었다. 모두는 린 드로스트를 노골적으로 감시하기 시작했다. 더는 숨기려고 들지도 않았다. 드로스트 가문은 린의 생각을 속속이 알고 있는 듯이 굴었다. 그리고 이제 린은, 염동력 수업에서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여 능숙하게 사람의 숨을 끊는다. 그렇게, 사형수를 처음 죽였던 날처럼 때때로 온전한 드로스트 가문의 사람이 되고는 했다. 자신을 잃고 있었다. 제정신을 차릴 때면,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몰래 바깥으로 편지를 부치기도 했으며, 도망치려는 시도도 해보았으나 의미 없는 저항으로 그치고 말았다.

 

린은 천성이 유순한 여인이었다. 언젠가 사내아이가 나뭇가지에 똬리를 튼 뱀을 코앞까지 가져다 댔을 때도, 반사적으로 몸을 보호했을 뿐, 아무도 다치게 하는 일이 없었다. 훈련받지 않은 능력자가 깜짝 놀랄 때면 으레 사람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나곤 한다는 걸, 사이퍼를 좀 가르쳐 본 자들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다. 린은 내성적이며 매사에 신중하다. 그래서 두려움이 그녀를 삼키고, 불안의 끝까지 내몰린 때에도 누군가를 해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린은 그녀의 방 한구석에 틀어박혀서 몸을 웅크렸다. 누군가 바로 옆에서 그녀를 불러도 듣지 못했고, 손을 대려고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염동력으로 다가온 이를 밀어냈다. 식사도 하지 않고, 제대로 된 잠도 자지 않고 그렇게 이틀을 있었다. 린과 친분이 있었던 드로스트의 사람들이 다섯은 왔다 갔으나, 린의 불안은 가시지를 않았다. 그리고, 디아나 드로스트가 린을 찾아왔다. 그녀는 바쁜 일과 중에 시간을 낸 것인지, 좌우로 사람을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드로스트 가문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라면, 디아나 드로스트는 그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없는 위치에 있었으나, 두 사람은 자리를 비켜달라는 디아나의 말에 정중히 물러났다. 린은 멍한 시선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인으로부터 물 한 잔을 받아든 디아나가 린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는다.

 

“린, 기운을 좀 차리세요.”

“…….”

 

린과 디아나의 시선이 맞닿았다. 침묵이 흐른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린이 입술을 떼었다.

 

“디아나 님, 일전에 제가 보았던 여인은 어떻게 되었는지요?”

 

디아나는 린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누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사형수를 죽이지 못했던 밤, 열린 문 사이로 엿보았던 매 맞는 여인이었다. 매 맞던 여인은 그날 이후, 드로스트 저택 그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드로스트 저택을 유심히 관찰하던 린은 그녀가 실종되었으며, 모두가 그녀를 없던 사람처럼 취급한다는 걸 알아차렸었다. 디아나는 어떠한 감정도 실리지 않은 얼굴을 하고 린에게 진실을 속삭인다.

 

“그녀는 드로스트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자유로워졌지요. 이후의 일은 모를 일입니다.”

“소녀도 곧 그렇게 되옵니까?”

“그렇지 않아요. 저는 당신이 그녀와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어요.”

 

디아나가 린의 양손을 부드럽게 붙잡는다. 린의 손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린이 쓰게 웃는다. 이제 린은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몬 배후가 디아나 드로스트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디아나가 린에게 물 컵을 쥐여주면서 말한다. 제가 당신을 돕겠습니다. 물을 들도록 하세요. 린은 한참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디아나 드로스트는 이런 순간에서조차 어여삐 보인다는 게 린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린이 시선을 물 잔으로 옮겼다. 받아들인다면,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느리게 말라 있던 목을 축인다. 그리고 천천히 무의식으로 빠져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완전히 잠에 빠졌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린을 침대에 눕히고 디아나를 응시했다. 디아나가 옷을 추스르면서 하인에게 지시한다. 이걸로 당장에 며칠은 정신을 차리고 있을 겁니다, 수업을 계속 진행하세요. 그리고아돌프 박사에게 이번에는 정신 교육이 필요한 아이가 있다고 전하세요. 하인이 알아들었다는 뜻에서 허리를 숙였다.

 

며칠 후, 린은 원하던 대로 드로스트 저택을 벗어날 수 있었다. 열흘이 지났다. 드로스트 저택으로 돌아온 린은 더는 심한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다. , 많은 것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무엇보다 조선에서 지냈던 기억이 흐렸다. 분명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추억이 있었는데,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드로스트 가문에서는 이제 린을 반듯이 장기 말처럼 다룰 수 있었다. 린은 이제 거부하지 않는다. 거절하지 않는다. 이따금 거부감을 가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가문이 정해둔 수업을 꼬박 들었다. 저항은 의미 없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품고 있는 거부감는 앞으로도 문제가 될 일이 없을 것이다. 디아나는 린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약간의 격려와 약간의 친절, 약간의 접촉. 보상 같은 거였다. 그때마다 린의 마음이 설레고, 머릿속이 뒤흔들렸다. 린에게 디아나 드로스트는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더는 그녀의 존재에 저항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린은 드로스트 저택을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목이 꺾여 죽었다. 디아나는 저택으로 돌아온 린에게 이제 온전한 드로스트의 사람이 되었다고 칭찬하였다. 린이 디아나에게 입을 맞춘다. 다급하면서도 조심스러운 키스였다. 디아나는 린의 그런 표현을 거절하지 않았다. 디아나 님은 이곳도 예쁘시옵고…, 이곳도 예쁘시옵고…. 린의 입술이 디아나의 곳곳에 닿는다. 린에게 디아나 드로스트는 아름답지만 위험한 꽃이었다.


Posted by 메에리웨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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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빈리첼] 해독제

Cyphers 2019. 2. 21. 17:32 |

https://youtu.be/yrg0E8LcJGI


리첼 스트라우스. 그 애를 향한 감정을 깨달았을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대단한 계기도 아니었다. 호라이즌에 새 멤버를 들일 때면 호라이즌의 숙소에서 파티가 열리고는 하는데, 라이언이라는 아이가 새로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그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넘어간다 싶었더니만 연구실에 스트라우스가 찾아왔다. 그녀는 파티에서 나눠주었던 기념품을 전해주러 왔다고 말했다. 평소라면 괜한 오지랖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렇게 귀찮게 느껴지지 않았었지. 그녀는 제 연구실에 멋대로 들어와 작업을 구경했다. 함께 기념품 상자를 개봉하고, 제피의 상호작용에 쓰일 음성을 녹음하고. 무심코 친구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문득 리첼 스트라우스를 대하는 제 태도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보다 부드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녀에게 호감이 있구나. 사람들이 감정을 깨닫는 일반적인 시점보다 이른 시점이었을 것이다.

 

리첼 스트라우스가 귀찮지 않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그녀가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사람과 어떤 관계를 이룬다는 건 귀찮고 불편한 일이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 싫었다. 변화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와 친구가 된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거북한 상상이었다. 저에게 친한 척 굴었다가 제풀에 지쳐 멀어지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그녀도 그렇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되어야 했다. 할아버지의 말대로 감정이란 인간에게 불필요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애석하게도 저는 그 감정을 조정할 수 없었다. 감정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기만 했다. 씨앗에 불과했던 마음은 덩굴이 되어 제 세계를 가득 뒤덮었다. 세계에 밀려 들어오는 그녀를 제어하려고 해보았으나 인제 와서 생각해 보면 다 의미 없는 짓이다. 저항하든, 저항하지 않든 그저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처럼 그 감정은 절대적이었다. 좋아하는 데에 납득할 수 있는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녀의 행동가지, 말 하나하나, 심지어는 찾아오지 않는 일조차도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가 되어버린다. 심지어 처음에 짐작했던 우정같은 감정도 아니었다. 책을 읽다가도, 작업 하다가도, 자기 전에도 문득 그녀가 떠오르고 만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리첼을 떠올리면 가슴 끝이 찡하고 울리면서 어떤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혀오는 듯한 답답함. 이건 분명 사랑이었다. 그 이유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 오늘은 그녀가 오지 않을까. 초조하게 스트라우스를 기다리던 하루가 갔다. 온종일 바보 같았다는 결론이다. 평소보다 일찍 작업을 놓았다. 괴롭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렬하게 초조했고, 잠을 자면 적어도 이 초조함은 잊을 수 있을 것이었다. 좀처럼 잠자리에 들지 못한다. 한참 동안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마구 피어오르는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병이다. 일상을 좀 먹고 있지 않은가. 치우고 싶어도 치울 방도를 몰랐다. 리첼 스트라우스를 만나면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좀 나아질 거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와 마주치는 장면을 수백 가지 방식으로 머릿속에 그리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

 

, 그냥, , 얼굴이 평소보다 좀 야윈 것 같아서.”

 

어딘가 어설픈 대답이었다. 닷새 만에 찾아온 스트라우스는 평소와 다르게 굴었다. 그녀는 오늘,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횟수가 지난번보다 월등히 많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눈이 마주쳤으니 그럴 수밖에. 그녀가 가져온 시계를 수리하면서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 생각해 봤다. 경우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았고, 그것을 확률적으로 추리기에는 표본이 압도적으로 부족하다. 결국에는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것이냐고 물었는데, 스트라우스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사람처럼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질문을 인지했다. 내가 야위었다. 생각해 보았던 그럴듯한 대답 중 하나였으나, 급하게 손까지 휘저으며 대답하는 모습이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나에 관한 떳떳지 못한 생각 중에서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을 고르던 중에 덜컥 발칙한 상상이 섞였다.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든지. 그 생각이 들자마자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어리석은 계산이다. 시선을 다시 시계로 옮긴다. 구조가 어렵다기보다는, 손재주가 필요한 조립 작업이었다. 손끝에 닿는 톱니바퀴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머리를 깨끗이 비워버리고 싶었다. 스트라우스의 존재감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두 눈이 작업대를 향하고 있는데도, 스트라우스는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할 때처럼 존재한다.

 

작업에 몰두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그녀는 또 뜬금없이 자신이 들떠 보이냐고 묻는다. 평상시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들떠서인 것인지. 그녀가 오늘 유난히 많이 웃었는지 되짚었다. 오히려 어색한 웃음이 많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물었더니 평소에 기분이 좋아 보이냐고 되묻는다. 너는 사소한 일에도 화사하게 잘 웃고, 같은 일이라도 긍정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지. 그것을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할 수 있을까.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적당히 건성으로 대꾸해 준다. 나는 제 감정을 알아차리고 난 이후에도 그녀에게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처럼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건 제가 사랑을 견뎌내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더 깊은 감정이 쏟아진다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앓는 감정으로도 충분하다. 잠시 스트라우스의 시선이 느껴진다 싶더니, 그녀는 보니까 정말로 야위었다면서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잔소리마저도 듣기 좋다니 갈 데까지 갔다. 스트라우스가 저를 향해서 손을 뻗고 나서는 사고가 멈추었다. 스트라우스의 손이 닿은 어깨가 무겁게 느껴졌다. 원했던 대로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멀거니 시계를 쳐다 보며 손만이 생각 없이 움직인다.

 

*

 

스트라우스가 연구실을 찾는 일이 늘었다. 최근에는 하루를 거르지 않고 사흘을 찾아 왔다. 저로서는 보고 싶어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좋은 일이지만 동시에 이상한 일이다. 그녀는 항상 저를 관찰하고 있었다. 바라보는 눈길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다. 혹시 그 감정이 제가 바라는 그 감정이 아닐까 상상해보는 일이 잦았다. 착각이 아니라고 하고 싶은 게, 그녀가 저를 좋아한다고 생각할 법한 근거도 제법 있다. 힐끔 곁눈질하면 너그러운 얼굴로 저를 응시하고 있다든지, 앉아 있을 때면 몸이 제 쪽으로 기운다든지. …안아준다든지. 전보다 거리가 더 가까웠다. 어떤 계기가 있었든, 전보다 저를 더 가깝게 여기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만 해도 내일 또 온다고 했다. 찾아올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그랬다. 스트라우스를 보내고 나니 연구실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예전에는 분명히 완성되어 있는 온전한 저만의 공간이었을 텐데, 이제는 스트라우스가 없을 때면 있어야 할 게 빠져 있는 공간이었다. 그녀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그녀가 보고 싶다.

 

실내의 불이란 불은 다 꺼버렸다. 그대로 침대로 가서 뻗었다. 잠들기에는 이른 시각이었지만, 창밖이 어두우니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리첼이 다녀간 흔적 때문에 아무것도 집중이 되지 않는데 뭘 어쩌겠는가. 오늘 그녀와 있었던 일들을 몇 번씩 반복해서 떠올려본다. 리첼이 풀어달라고 부탁했던 고교 수학 문제를 다시 풀었다. 그녀가 건넨 문제들은 하나 같이 꼬인 방식이 비슷했는데, 그 공통점에 기초하여 그녀가 풀만한 문제도 몇 개 만들어 본다. 함께 먹었던 저녁 식사의 맛을 곱씹었다. 나는 리첼이 찾아오는 날만큼은 식사를 제때 제대로 챙겼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걱정할 테고, 무엇보다, 저는 안 먹는다고 해도 그녀는 제때 먹는 게 좋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배웅하러 현관문 앞까지 갔을 때를 떠올린다. 리첼이 저를 안아 주었었지. 제 품 안에서 느껴졌던 온기와 촉감이 뇌리에서 사라지지를 않는다. 그때 저도 그녀를 안아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 심장이 타는 듯한 초조함이 덜했을까. 리첼이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았던 지난 순간들을 전부 열거해 본다. 그 생각들이 저를 괴롭게 한다. 저를 괴롭게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앓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웅크렸더니 근처에 있던 제피가 심박 수가 상승했다고 경고한다.

 

제피…. 사과의 표현, 계속 재생해 줘.”

 

제피의 음성 출력 뒤로 우연히 녹음된 리첼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수십 번 반복해서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대로 자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기를 바란다. 잠기운이 몰려온다. 지독한 너의 존재도, 저의 존재마저도 전부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리첼의 하교 시간이 되면 하던 일을 전부 멈추고 문과 가까운 창가 쪽에 앉아있는 것이다. 딱히 벽시계를 보거나 알람을 맞춰 둘 필요는 없었다. 리첼이 올 시각 즈음이 되면 저절로 알았다. 길 저 끝에서부터 익숙한 인영이 보이기 시작한다. 허브차를 목 뒤로 넘기면서 그 모습을 지켜본다. 예전이었다면 머그잔에 담긴 것이 커피였을 테지만, 이제 카페인은 끊었다. 그러지 않아도 리첼 스트라우스 때문에 두근거리는 가슴이 더 뛸 필요는 없다. 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열어주었다. 리첼이 오늘따라 더 예쁘게, 화사하게 웃는다. 가슴 한쪽이 위태로울 만큼 시큰거린다.

 

어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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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메에리웨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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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빈리첼] Sparkle

Cyphers 2019. 2. 21. 17:30 |

https://youtu.be/Vh7iHrD7PR4



리첼, 너 그 멜빈이라는 오빠 좋아하는 거 아냐?”

 

 문제의 그 질문이 튀어나왔던 때는 밴드 연습을 마치고 군것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연습실 바닥에는 과자들을 펼쳐 놓았고, 우리는 과자를 중심으로 둥글게 둘러앉았다. 시답잖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루카스는 이탈리아어 선생이 복도에서 나자빠지는 걸 보았으며 사라는 자기 조각 케이크를 먹은 범인이 아버지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줄리아는 내가 방과 후에 어딜 쏘다니고 있는지를 궁금해했다. 며칠 전, 급하게 멜빈의 연구소를 찾아가는 길에 그녀와 마주쳤었다. 호라이즌의 멜빈 리히터를 이따금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아이들의 관심이 저에게 쏠렸다. 며칠 전뿐 아니라 이전에 종종 자리를 비웠던 이유까지 밝혀지고야 말았다. 천재 공학자 멜빈 리히터란, 아이들의 흥미를 끌 만큼 흥미로운 주제였다. 멜빈의 연구실에 처음 찾아간 계기부터 최근 찾아간 이유, 그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태도로 이야기를 나누는지까지 속속히 대답해야 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근데 왜 그렇게 서둘러서 가느냐는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뒤늦게서야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었다. 글쎄~ 왜 그랬지. 하하. 이 대답에 따라왔던 것이 문제의 그 질문이었다.

 

, 뭐래니. 그런 거 아니거든. 늦은 시각에 가면 걔가 별로 안 좋아해서 그래.”

 

그때는 그렇게 괜한 소리라고 변명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물음은 그때부터 제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서 언니와 대화를 나눌 때였다. 오늘 글쎄, 애들이 나더러 멜빈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니까. 평소 하던 대로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다가 그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왜 그렇게 서둘러서 멜빈을 찾았지? 그 의문이 불쑥 다른 생각들을 헤집고 고개를 내밀었다. 욕실에서도 그 의문의 답을 고민했다. 찾으면 찾을수록, 멜빈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는 줄리아의 말이 그럴 듯했다. 연구실에서 멜빈과 어울리는 게 기대되어서, 멜빈을 빨리 보고 싶어서 서둘렀었던 것 같았다. 아이참, 걔는 또 왜 그런 말을 해가지고. 똑똑. 누군가 조심스럽게 욕실의 문을 두드렸다. , 혹시 자는 거야? 너무 오래 욕실에 있는 것 같아서…. 괜찮아? 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제 손가락은 물에 불어서 지문이 쭈글쭈글해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자그마치 두 시간이나 지나있다. 욕조에서 두 시간. 서둘러서 욕실을 나선다는 게 팔로 시계를 치고 말았다.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시계 부품들이 욕실 바닥에 흩어졌다. 바깥에서는 어쩔 줄 모르는 언니의 목소리가 들리고, 저는 그런 언니를 진정시키면서 부품들을 줍느라 바쁘다. 쓸데없는 생각 때문에 정신이 빠져 있다 싶다. 정신 차려야지. 마음을 다잡으며 욕실을 나선다. 다음 날이면 사라질 잡념이라고 믿었다.

 

*

 

아까부터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

 

멜빈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평소 성격을 보았을 때, 참고 참다가 물어봤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딴생각에 잠겨 있었던 걸까. 고민하면서 동시에 변명거리를 찾았다. 내가 널 좋아하고 있는지 고민했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잖아! 허둥지둥 손을 내젓는다.

 

, 그냥, , 얼굴이 평소보다 좀 야윈 것 같아서.”

 

멜빈이 한참 동안 제 표정을 살핀다. 거짓말이 들켰나 싶어서 마른 침을 삼키고 있는데 그가 끝내는 작업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도감에 피식 미소가 걸린다. 그가 다시 작업에 몰두한다. 멜빈의 작업대에는 어제 망가뜨린 욕실 시계가 놓여 있었다. 어제부터 저를 괴롭히던 고민은 학교에 가서도 끊기지를 않았다. 문제를 오래 앓고만 있는 것은 제 성정에 맞지 않는 일이라, 방과 후에 곧장 멜빈을 찾아가리라 다짐한 것이다. 마땅히 방문할 핑계라고는 무언가 고장이 났다는 핑계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그냥 놀러왔다고 할 수 있었을 텐데. 이번에 그를 찾은 이유가 이유인지라 무언가 핑곗거리가 없으면 그 똑똑하다는 멜빈이 제 근심을 알아차릴 것 같다는 걱정이 들었었다. 어제 시계를 망가뜨린 덕분에 마침 찾아갈 핑계도 있지 않은가. 아니, 솔직히 그냥 좀 쑥스러웠던 걸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를 이렇게 마주했는데도 이렇다 떠오르는 발상이 없었다. 고민만 깊어질 뿐이다.

 

멜빈, 혹시 나 들떠 보여?”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기분이 좋아 보이거나, 그러냐구. 평소에.”

글쎄.”

 

그에게 뭐라도 물어보면 해답이 나올까 싶어 물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멜빈을 또 한 번 관찰하면서, 하던 고민을 마저 이었다. 내가 쟤를 좋아한다면 쟤의 어디를 좋아하는 걸까. 공구를 든 손에서 시선을 조금 옮기면 얄팍한 손목이 보인다. 피부색은 여기 아이들보다 조금 어둡다. 시선이 팔을 따라 팔꿈치까지 닿는다. 접어 올린 소매가 보인다. 소매 폭이 팔 두께에 비해 무척 넉넉하게 넓었다. 피곤해 보이는 표정과 야윈 볼제 고장 난 시계을 바라보는 아래를 향한 눈. …야윈 볼?

 

“……잠깐, 진짜 좀 마른 것 같네? 뭐야, 멜빈. 너 요새도 평소에 잘 안 챙겨 먹지.”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전에는 이것보다는 아니었단 말이야.”

 

그렇게 몇 번 더 잔소리가 이어졌다. 멜빈이 뚱한 표정을 지으면서 제 물건을 손본다. 제 물건을 수리해주고 있는 녀석한테 싫은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에 손을 뻗는다. 손바닥에서부터 그의 온기가 전해져온다. 그 온기와 감촉에 주의를 집중했다. 멜빈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시계 사이에 공구를 두고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

 

멜빈의 연구실로 가는 일이 늘었다. 오늘은 결국, 할 일이 없는 거냐고 한 소리 듣기까지 했다. 사흘 연속해서 찾아왔으니 그렇게 보일 법하다. 차마 할 일이 있든 없든 찾아오고 있는 거라고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네 연구실이 조용한데 있을 건 다 있어서 쉬기도 좋고, 숙제하기도 좋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둘러댔더니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는지 그는 더 캐묻지 않는다. 책을 읽고 있는 그의 맞은편 자리에 가서 학교 숙제를 꺼냈다. 쉬기 좋다는 말이라면 몰라도 숙제하기가 좋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에게 틈틈이 눈길이 간다. 오늘도 멜빈의 머리는 부스스했고, 소매는 팔꿈치 위로 접혀 있다. 눈동자는 깊이 잠겨 있었다.

 

이렇게 자주 찾아오면서 여러 가지 깨닫게 된 것이 있다. 그는 수학 문제라면 뭘 가져다주어도 막힘 없이 풀이를 쓴다. 정적을 깨고 골머리를 앓던 문제 몇 개를 내밀었더니 건넨 지 얼마 안 되어 완벽한 풀이가 돌아왔다. 그의 수준이라면 충분히 생략할 만한…, 전부 생략할 수 있었겠지만, 어쨌든 상세하게 풀이가 되어 있었다. 해설에서 느껴지는 배려에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거라면 이런 점을 좋아하는 것일까? 내가 널 좋아하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수학 문제처럼 명쾌한 해답을 내려줄까? 멀거니 쳐다보고 있자니 멜빈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그 점이 괘씸하고 귀여워서 웃음을 터뜨렸다.

 

금세 여섯 시가 되었다. 저가 또 새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그는 끼니를 아주 거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각 즈음이 되면 어슬렁어슬렁 일어나서 냉장고 앞을 향한다. 변변치 않게 들어 있는 냉장고에서 기어이 먹을 만한 냉동 식품을 꺼내 책상 위에 내놓는다. 내 몫의 식사가 올라 오고, 멜빈의 몫의 식사가 올라 온다. 잘 먹나 싶어서 시선을 떼지 않고 쳐다보고 있으면, 그가 입 안에 먹을 것을 한 스푼 밀어 넣는다. 며칠 전에 사다놓은 과자까지 까먹으면서 해가 질 때까지 멜빈의 작업을 구경하고, 떠들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다. 가방을 챙기고 문 앞까지 나섰더니 멜빈이 배웅을 하러 나왔다.

 

멜빈, 나 내일도 올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먹을 건, 됐어.”

고마워서 그래. 그러지 말구 말해 봐~… 네 입맛에 안 맞는 걸 사오면 좀 그렇잖아.”

정말로, 딱히 사오지 않아도 괜찮은데….”

너도 참. 평소에 제대로 안 먹고 있으니까 겸사겸사 먹이고 말 거야. 같이 저녁 식사도 하고 좀 좋아. ? 연어? 말만 해, 좋아하는 거로 사올 테니까.”

“……아무거나 괜찮아.”

좋아. 그럼내가 좋아하는 걸로.”

 

멜빈이 고개를 끄덕인다. 은근슬쩍 다음 방문까지 잡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저가 이번에 새로 깨달은 사실은, 멜빈은 제 생각만큼 저를 귀찮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지 말라는 소리는 안 했잖아. 그렇겠지? 또 와도 되는 거겠지? 용기를 내어 그를 꼭 안아주었다.

그럼, 내일 또 올게. 또 봐.”

 

멜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저에게서 힘없이 떨어진다. 기운을 좀 내라고 그의 어깨를 두들겨 준다. 이대로 떠나기가 아쉬웠다. 벌써부터 내일이 기다려진다.

 

*

 

리첼, 또 어딜 가? 요 며칠 학교만 끝나면 바쁘게 어딜 가더라.”

혹시 저번에 말했던 그 멜빈 오빠한테 가는 거 아냐?”

, 진짜?”

 

방과 후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줄리아를 비롯한 친구들이 저를 둘러싸고 들었다. 처음에 멜빈을 좋아하느냐고 물을 때만 해도 장난스러운 물음이었는데, 몇 주가 되도록 줄기차게 자리를 비우니 이제는 뭐라도 짐작이 가는 모양이었다. 끝내는 그들이 은근한 기대를 담아서 저를 바라보며 묻는다.

 

정말로 그 오빠한테 관심 있는 거야?”

그을~. 너희들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은 정해져 있는 것 같은데, 난 거기서 빠질래.”

 

여유롭게 아이들의 질문 공세에서 빠져나왔다. 제 마음을 확신하기 전이었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쩔쩔맸을 테지만 이제는 경우가 다르다. 나는 내 마음을 알고 있었다. 멜빈에게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그와 함께 있지 않을 때도, 그를 생각하고는 했다. 내가 멜빈 리히터를 좋아하나? 제 골머리를 썩였던 이 의문은 그냥 괜한 의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의문에서부터 시작된 감정인 것인지, 그 이전부터 있었던 감정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지금 리첼 스트라우스가 멜빈 리히터를 좋아하고 있다는 건 확실한 사실이었다. 이렇게 줄기차게 이유 없이 찾아가면 저가 그를 좋아하는 걸 들킬지도 모르겠다. 들켜도, 괜찮아. 연구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한 손에는 학교 가방이, 다른 쪽 손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군것질거리가 들렸다. 가방과 군것질거리를 박자에 맞춰 앞뒤로 흔들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멜빈의 모습이 보인다.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 난 멜빈을 좋아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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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공학과 조교는 어딘가 퇴폐미가 있는 여성이었다. 늘 피곤에 찌든 모습이었지만, 얼굴이 예쁘장하고 색기가 있어서 학교의 여럿을 홀리고 다녔다. 거기에 성적인 욕구도 적지 않은 사람이었다. 밤늦게 기계과 실험실을 사용할 때면 이따금 바로 옆 휴게실에서 신음이 흘러나오고는 했다. 들어달라는 듯이 적나라했다. 그 여자가 학부생과 섹스하는 소리였다. 그것도 최음제와 대마를 쓰면서 즐기는. 그녀가 저에게 관심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일부러 저가 실험실에 오는 시간에만 남자를 바꿔가며 섹스를 했으니까. 멜빈 리히터에게 들려주는 데에 흥분감을 느낀다는 듯이 그래왔다. 조교가 데려오는 남자는 하나 같이 신입생들이었고, 저는 그녀가 제 어려보이는 외모를 좋아하는 거려니 짐작했다. 더러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제 앳된 얼굴에 흥분하는 문제적 취향의 사람들이.


후배위에 최음제 써서 섹스를 해라. 그 요구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건 역시 그 여자였다. 그 여자랑 하면 될 것 같았고, 약간의 여지를 만들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저를 안았다.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등불 하나만 켜둔 실험실은 어두웠으나, 섹스하기에는 충분했다. 여자는 약을 소지하고 있었다. 둘 다 최음제를 삼켰다. 달아오르는 몸을 맞붙이고 부비적거렸다. 최음제를 직접 사용하는 건 오랜만이어서 영 적응이 안 되었지만, 정신없으니 정신없는 대로 하는 매력이 있었다. 농밀히 혀를 섞고 여자의 품에 안겼다. 처음에는 그녀 뜻대로 하게 두었다. 제 위에 올라탄 그녀가 간드러진 교성을 내며 허리를 흔들었다. 제 유두를 간지럽혔을 때는 저도 앓는 소리를 좀 내고 말았다. 좀 지나서는 정상위로 자세를 고쳤다. 그녀의 큰 가슴을 내리누르고 주물렀다. 여자의 아래에 제 것을 박고, 세차게 안쪽을 찔렀다.


머릿속이 어느 정도 비워질 만큼 쾌감이 일고 있었다. 약 기운 때문이었다. 막 사정했는데, 얼마가지 않아서 제 것이 또 발기했다. 사용한 콘돔은 대충 늘어뜨려놓고, 새것을 끼웠다. 저는 꽤… 섹스 파트너를 난폭하게 다루는 걸 좋아했다. 조교의 예상과는 달랐겠지만, 그랬다. 여자를 뒤집었다. 실험실 테이블을 붙잡게 한 다음 제 것을 쑤셔박았다. 그녀의 머리채를 쥐여채고, 고개가 들리도록 잡아당겼다. 살과 살이 빠르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제 고간과 여자의 엉덩이가 닿을 때마다 큰 가슴이 몸통 아래에서 흔들리는 게 보였다. 허리선과 등줄기를 어루만졌다. 흥분은 좀처럼 가시지를 않았다. 차오르는 달뜬 숨을 내뱉는다. 한참을 이렇게 짐승 같이 몸을 섞어야 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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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돌프] 피의 장례식

Cyphers 2019. 2. 21. 17:06 |

나는 아돌프 빈다우스를 찔렀다. 로커드 마틴사로부터 도망쳤던 박사는 또 능력껏 연구 시설을 마련해 놓았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마주했다. 메스는 급소에 정확히 꽂혀 들어갔었다. 아버지의 살갗은, 아돌프 빈다우스의 살갗은 다른 사람의 살갗과 다를 바가 없이 부드러웠다. 박사는 그때의 일격으로 생사를 오가는 고비를 맞이했을 것이다. 박사를 찌르고부터 사흘이 지났다. 아돌프 빈다우스는 지금쯤 죽었을지도 모른다. 클리브 스테플은 아돌프 빈다우스를 뒤쫓는 일을 그만두었다. 박사와 마주한 다음, 기억이 반나절은 통째로 날아갔던 데에 두려움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아돌프 빈다우스가 화제에 오르는 것조차 피하게 되어서, 그의 안에서 기생하고 있는 저로서는 박사가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이제 클리브에게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그럴 의사도 없으며, 그럴 수도 없었다. 아마도 클리브의 의식을 밀어낼 만큼 강한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클리브 스테플은 평소처럼 기삿거리를 찾으러 다녔다. 꼭 박사가 아니더라도 거리에는 기삿거리가 차고 넘쳤다. 혼란스러운 때였다. 능력자와 비능력자 사이의 갈등과 능력자 폭주, 아동 착취와 의문의 화재, 실종 사건…. 클리브 스테플은 눈 감을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건 저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20세기의 화젯거리들은 과거에 살던 저에게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왜 그간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정치인의 불륜 소식도 재미있었으며, 경마장 인터뷰도 그럭저럭 볼 만했다. 클리브는 그런 와중에 10파운드를 땄었다. , 우스운 일도 있었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결혼하자, 클리브 스테플이 집에서 혼자 위스키를 퍼마시고 뻗어버린 일이었다. 여배우 이름이 클라라였던가, 클라우디아였던가. 그런 이름이었는데, 어련히 중요할까. 어쨌든 그가 그렇게 숙취로 고생하는 그런 일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 박사가 없는 일상을 살아갔다. 박사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다. 클리브의 관심사를 통해서 극복해낸 것이다. 저는 빈다우스, 그로부터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더는 머릿속에 아버지가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랬다. 나는 평범한 나날의 연속을 즐겼다.

 

이틀째 클리브가 철야를 했다. 정리해야 할 자료가 많아서 한참 고생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클리브 스테플은 부지런한 사람이다.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않는 것만 제하면 그랬다. 글을 쓰는 책상 위로는 타자기가 놓여있고, 온갖 종류의 자료와 책 따위가 늘어져 있다. 클리브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건 저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그가 글을 쓸 때, 그의 의식의 흐름을 타다 보면 많은 걸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저에게 도움이 됐다. 전화가 울린다. 동료 기자인 새뮤얼로부터 온 전화였다. 클리브는 수화기를 어깨에 걸친 채로 작업을 계속한다.

 

클리브? 지금 바빠?”

, 한창 바쁘지. 하지만, 무슨 일이냐에 따라서 시간을 내 볼 수도 있고.”

네가 빈다우스 박사 건에 완전히 손 뗀 건 아는데, 그 사람에 관해서 가장 잘 아는 게 너잖아.”

이런, 별로 듣고 싶지 않은 화제인데.”

 

그래, 저도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클리브의 몸을 차지해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 모처럼 저는 빈다우스가 없는 삶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으니까. 없이도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새뮤얼이 수화기 건너편에서 계속 입을 뗀다.

 

걱정 마, 이런 부탁도 정말 마지막일 테니까. 사실은 그 사람 부고를 실어야 하거든. 장례식장에 가 줘. 지금 독일에 있는 건 너뿐이야.”

 

부고. 잠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클리브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당황한 그의 감정이 제 사고로 흐리게 전해져온다. 아돌프 빈다우스가 죽었다고. 원인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저가 찔러서 생긴 상처가 치명적이었던 거겠지. 죽지 않을 만큼, 멀쩡하지 않을 만큼 찔렀던 것이 기어코 그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진정하려고 애썼다. 그것도 그럴게, 지난 몇 주간 잭 더 리퍼는 아버지 없이 잘 살아있지 않았는가. 빈다우스가 사망한 건 예상하지 못할 일이 아니었다. 찌를 때부터 어쩌면, 어쩌면 죽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를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한 건 바로 저였다. 그래, 나를 배신했던 그 자가 죽었다고 해 봐야 문제될 건 없어. 클리브 스테플의 일상에 집중하면 되는 거야. 아돌프 빈다우스, 아돌프 빈다우스, 아버지, 아버지. 나는 그가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이야. 그렇지, ? 그렇다고 말해, 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어떤 감정이 부글부글 끓었다. 온갖 감정이었다. 클리브는 여전히 새뮤얼과 통화를 하고 있었고, 그 또한 이 감정을 인지했다. 자신의 감정이 아닌 것이 심장이 저릴 정도로 피어오르니 의아하고 당황한 모양이었다. 저는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머릿속이 온통 아버지로 가득했다. 뭐라도 해야 했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서는 숨 쉴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강렬한 충동이 나를 매섭게 몰아세우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미칠 것 같았다. 커지는 감정을 이겨내지 못한다. 클리브의 의식을 저 멀리 치워버렸다. 새뮤얼에게 장례식장 위치를 묻는다. 제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거기가 어디라고?”

안 한다더니? 그보다, 방금 머리가 깨질 것 같다며. 괜찮은 거야?”

괜찮아. 당장 어딘지만 말해.”

뮌헨의 중앙 병원 부속 장례식장이야.”

 

장소를 들은 직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당장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곳에 가야 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나자빠지며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책상 위에 있던 물건들을 팔로 쓸어서 전부 바닥에 떨어뜨렸다. 메스를 챙기고, 외투를 걸친다. 침착하려고 애썼다. 적어도 장례식장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평소의 클리브 스테플처럼 보여야 한다. 문을 잠그지도 않고 실내를 나섰다. 뮌헨으로 가는 택시를 잡았다. 바퀴 굴러가는 게 너무나도 느리게 느껴졌다. 택시 운전사에게 날붙이라도 들이대면 빠르게 도착할 수 있을까. 장례식장에 도착하면 이 거대한 공허함을 메울 수 있을까.

 

어리석었다. 지난 몇 주간, 저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 아버지를 운에 맡긴 것부터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아버지를 잊을 수 있을 거라고 단단히 착각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은 그를 지워내지 못할 걸 알고 있으면서, 자신을 속인 것이다. 잭 더 리퍼는 스스로를 파국으로 몰아세운 것이다. 어찌 아버지를 잊을 수 있을까. 아버지의 존재는 너무나도 거대해서, 이 세상에 살아 숨쉬지 않는다는 사실이 저를 짓이긴다. 그의 공백이 만들어낸 마음속 구멍이 크게 입을 벌려 저를 삼키고,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시켰다. 죽을 것 같았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 내내 저는 주먹을 펼 수가 없었다. 앞 좌석 시트에 이마를 박고 괴로움과 분노를 겨우 견뎠다. 운전사에게는 지갑에 있던 돈을 통째로 건넸다. 잔돈을 받을 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부터 할 일이 있다. 중요한 할 일이었다.

 

철물점에서 산 공업용 자물쇠로 3번 장례식장의 출구를 단단히 봉쇄했다. 근처에 있던 직원과 손님들이 지금 뭘 하는 거냐고 물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곳의 창문은 체격이 작은 어른 한 명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만한 작고, 높은 곳에 달려있다. 그러니 그곳을 주의 깊게 지키면 아무도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품속에 있던 메스를 꺼냈다. 저 앞을 기웃거리며 무언가 말하는 직원의 목부터 찔렀다. 바로 연이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손님의 얼굴을 갈랐다. 난도질 한 번, 한 번에 제 분노가 실린다. 저를 지배하고 있는 과한 감정이 좀 덜리는 것 같았으나, 제 품속의 분노는 너무나도 컸다.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이곳에 머물러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한 분노였다. 그들은 저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갖고 있을 테다. 아버지가 저버리지 않은 관계란 과연 어떤 느낌일까. 제 손에 죽어 나가고 있는 자들은 저와는 다르게 아버지와 만들어지지 않은, 진짜 관계가 있는 자들이었다. 죽어 마땅했다. 연고의 잔재를 전부 지워버리고 싶었다.

 

핏물이 튄다. 살을 헤집고, 근육을 잘랐다. 이곳저곳에서 비명을 내질렀다. 찢기는 고통에 놀라고 아파서 소리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앞으로 살해당할 거라는 두려움에 못 이겨 소리치는 자도 있었다. 피 냄새가 진동했다. 꽃을 담아두는 함에도 피가 튀었다. 사람들이 도망치려고 어수선하게 돌아다닌다. 그런데 인파 사이에 가만히 서서 저를 응시하는 시선이 있었다. 멜빈 리히터였다. 그는 굳은 얼굴을 하고 저를 관찰하듯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저는 누군가의 가슴팍에 박아 넣었던 메스를 뽑았다. 눈앞의 사람이 무겁게 바닥으로 떨어져 구른다. 곧장 멜빈 리히터에게 향했다. 그래, 너는 아버지의 진짜 혈육이었지. 그는 별로 슬픈 것 같지도 않았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

 

클리브 스테플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구치소 취조실에 있었다. 새뮤얼의 전화를 받고 극심한 두통을 느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온몸은 구속되어 있고, 경찰 측에서는 사람 바꿔가면서 그를 다그쳐댔다. 형사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아니, 글쎄, 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까요?”

기억이 안 나?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놓고 뻔뻔스럽게 심신미약으로 감형이라도 노리고 있나? 목격자는 차고 넘치고, 네 놈은 사람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어.”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어요.”

명백한 증거도 있어. 자네가 쓴 흉기지. 감식 결과, 그쪽 지문으로 가득해.”

증거? 증거를 잠시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저는저는 아시다시피 사이코메트리 능력자입니다. 직접 보지 않고는 못 믿겠어요. 정말 그런 사실이 확인되면, 뭐든 협조적으로 굴겠습니다. 부탁입니다….”

 

형사는 비닐 지퍼락에 들어있는 메스를 보란 듯이 테이블 위로 내던졌다. 클리브 스테플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메스를 내려다본다. 그러고 보면, 언젠가부터 자신의 집에는 저것과 똑같이 생긴 게 몇 번씩 발견되고는 했었다. 그의 양 손목은 구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형사는 클리브 스테플이 메스를 향해 손을 뻗는 걸 저지하지 않는다. 클리브 스테플은 지퍼백 위로 손을 올렸고, 고스란히 메스의 기억을 읽었다. 클리브 스테플이 집을 나설 때 코트 안 주머니에 들어간 것부터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낯선 사람들을 수없이 찌르고 들쑤시는 기억까지. 그 메스를 쥐고 있는 건 명백하게 클리브 스테플, 그였다.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몸을 늘어뜨렸다. 멀거니 허공을 바라본다. 실소를 터트린다. 형사는 혐오하는 표정으로 클리브 스테플을 응시했다. 스테플은 앞으로 꼼짝없이 형을 받게 될 것이라 예감한다.

 

하하…. 하하하. 어쩌면 저는다중인격장애를 겪고 있는 모양입니다….”

 

다음 날 아침, 독일 신문을 비롯해 유럽 곳곳에는 기자 클리브 스테플에 관한 기사가 대대적으로 실렸다. 살해당한 자의 숫자도 숫자이지만, 잔인한 사건이었고, 그가 능력자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아돌프 빈다우스의 장례식장에서 벌어진 사건을 피의 장례식이라고 불렀다. 많은 비능력자가 능력자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증오하는 계기가 되었다. 클리브 스테플을 동정하는 이는 잭 더 리퍼뿐이었다. 그는 피의 장례식을 마지막으로 클리브 스테플의 몸을 차지하는 일이 없었다. 죽었던 잭 더 리퍼는 정말로 죽은 자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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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메에리웨더
:

루이스는 옅은 갈색을 띠는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건지, 그의 몸은 비정상적으로 천천히 깊은 곳으로 잠긴다. 코와 입에서 나온 공기 방울이 수면을 향해 떠오른다. 루이스의 멀건 시선은 공기 방울에 머물러 있다. 그는 넋을 놓고, 자신이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다는 것만 겨우 인지했다. 기이하게도 그는 숨 쉬는 게 곤란하지 않았다. 그는 물속에서 숨 쉴 수 있다는 걸 기이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저 가라앉는 걸 인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아주 깊은 곳까지.


“왜 정신을 놓고 있어?”


누군가 루이스에게 말을 붙였다. 루이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 붙인 상대를 똑바로 응시했다. 제인이었다. 내가 그랬어? 루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꾸했다. 제인은 더 캐묻지 않고 루이스의 옆에 앉는다. 루이스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매만지고 있던 나뭇가지를 내려놓았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그는 땅이나 파면서 놀고 있던 게 분명했다. 제인이 돌이나 쌓으면서 놀자고 말했고, 루이스가 동의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제 곧 9살 되는 제인은 며칠 후면 고아원을 떠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둘은 그 일에 관하여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몇 시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제인이 입을 뗐다. 나, 이제 제인 그레이가 돼. 그녀를 데리고 가는 부부의 성씨가 그레이인 모양이었다. 루이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설에서 그럭저럭 친하게 지내던 또래 친구가 가정을 꾸린다는데, 축하해줄 일이었다. 입양된다는 건 원생들의 부러움을 살 일이기도 했지만, 루이스는 별로 질투가 나지 않았다. 그런 성정을 타고났다. 가서 잘 지냈으면 좋겠어. 루이스가 진심 어린 바람을 전한다. 응. 제인이 짧게 긍정했다. 두 사람은 다시 말없이 놀이에 집중했다.


제인은 알려진 대로, 나흘 후에 시설을 떠났다. 그레이 부부는 모래색 자동차를 모는 사람들이었다. 모래색 자동차의 뒷좌석에 제인이 앉는다. 아이들과 함께 그녀를 배웅하러 나온 루이스는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친구의 안녕을 바랐다. 이렇게 친구를 떠나보낸 건 제인이 처음이었다. 그 이후로도 이따금 시설을 떠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루이스는 정문까지 나와서 배웅을 했다. 제인, 조슈아, 에드워드, 재키, 브라이언, 질…. 떠나간 아이들의 얼굴이 루이스의 머릿속에서 어른거린다. 그리고, 나이가 좀 있는 해리가 가정을 찾은 건 의외의 일이었다. 잘 있어, 루이스. 해리가 인사한다.


해리가 타고 있는 자동차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루이스가 눈을 떴다. 수면 위로 몸을 번뜩 일으킨 느낌이었다. 아직 해가 온전히 뜨지 않았는지, 새벽의 푸른 빛이 얇은 커튼을 뚫고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가 눈을 부비적거리면서 협탁 위의 시계를 확인한다. 다섯 시 좀 넘은 시간이었다. 그가 비척거리면서 침대에서 일어난다. 좀 이르지만, 아침 식사 준비를 할까. 그렇게 생각한 루이스가 냉장고에서 베이컨과 계란을 꺼내고, 프라이팬을 든다. 루이스는 요리를 하면서 생생하게 기억나는 꿈을 되짚어본다. 고아원 시절의 꿈을 꾼 건 오랜만이었다. 평소에 기억하면서 살기에는 너무 오래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루이스는 흐물거리는 베이컨과 반만 익힌 계란을 접시에 올려놓았다. 음식을 형식적으로 포크로 찍어 먹으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시절을 회상한다. 대단한 계기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이번 꿈이 너무나도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랐던 고아원은 교외에 있었다. 그의 첫 번째 기억은 흙바닥에 앉아서 시설의 아이들과 어울리던 일이다. 몇 안 되는 장난감 같은 건 힘 있는 아이들이 차지했고, 대부분의 아이는 루이스처럼 아무것도 없이 방치되고는 했다.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 당시 아이들에게는 땅 파는 일 같은 게 그럭저럭 즐거운 놀이였다. 어쩌다가 고아원에서 자라게 되었는지 알게 된 건 루이스의 머리가 좀 굳고 나서였다. 그렇게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아원 입구에 버려져 있던 갓난아이를 원장이 거뒀다. 길에 버려지는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올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때마침 시설에는 여유가 있었다. 아직 추위가 매서운 한겨울이었다. 루이스라는 이름이 붙고, 출생 서류가 작성된 날이 곧 그의 생일이 되었다.


회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면서 루이스는 과거를 떠올리는 걸 그만두었다. 그 시절에 관한 이렇다 할 좋은 추억도 없었다. 그는 끝까지 입양되지 않았고, 성인이 되는 날 시설을 나섰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일을 전전했었지. 능력자 사회에 복잡하게 얽히기 전까지는 그랬다. 건조한 유년. 성년이 된 해도 마찬가지로 건조했다. 루이스는 식기를 싱크대 안에 넣는다. 이제는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의 색깔이 달라져 있었다. 해가 뜨고 있었다. 오래된 기억들을 차곡차곡 접어 넣는다. 그는 할 일이 많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받은 키워드. '꿈, 무의식, 유년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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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메에리웨더
:

멜빈 리히터는 안타리우스와 손을 잡았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갔다. 안타리우스가 꺼림칙한 사업동반자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리히터는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가장 유용한 도구를 쥐는 데에 망설이지 않는다. 그는 안타리우스가 손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짜냈다는 사실을 괘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문제 삼지는 않았다. 다만, 그 화를 다른 곳에 풀었다. 연구 건으로 얽히게 된 강화 인간 아이작은 멜빈 리히터의 분노 섞인 가학심을 쏟아내기에 좋은 상대였다.


“으읍…! 응, 아으…! 읏.”


아이작은 흰 천으로 된 재갈을 물고 앓는 소리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알몸으로 검은색 사무용 의자에 단단히 묶여 있다. 일반적인 구속이라면 그가 단숨에 끊을 수 있겠지만, 그를 동여맨 밧줄은 능력자 제압용으로 개발된 것이어서 가볍게 몸부림치기도 어려운 물건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밧줄을 썼다고 해도 아이작은 구속을 끊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항상 이런 방식으로 성적 욕구를 풀고 싶었으니까. 그는 아래에 진동 딜도를 꽉 물고 몸을 뒤틀어댔다.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몇 번이고 혼자서 절정에 다다랐는지 모른다. 그는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숨이 넘어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멜빈 리히터는 그런 아이작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었다. 그의 앞에는 작업대가 놓여있다. 작업대 위에 놓인 의식을 잃은 여자는 멜빈 리히터가 능력 증폭제를 주입할 때마다 경련을 일으켰다. 그럴 때면 여자의 상태를 기록하는 모니터 화면에 어떤 수치가 움직이고, 멜빈은 그 수치를 이따금 서류에 옮겨적는다. 또 한 번 절정에 맞이한 아이작이 높은 신음을 내질렀다. 그는 과한 쾌락 때문에 괴로울 지경이었다. 아이작의 교성을 들은 멜빈 리히터가 조금 인상을 쓴다. 그가 눈만 굴려서, 아이작을 응시한다. 눈초리에는 신경질이 서려 있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시끄러워."


멜빈의 핀잔을 들은 아이작이 바르작거렸다. 그가 사나운 눈빛을 하고 멜빈을 쏘아본다. 이제 적당히 좀 하자는 항의 같은 거였다. 동시에 그는, 입 밖으로 새던 목소리를 죽인다. 두 사람은 그런 관계였다. 멜빈 리히터가 명령하면 아이작은 명령에 따른다. 아이작은 성적인 부분에서만큼은 철저히 멜빈 리히터의 말을 따랐다. 그가 거친 숨을 고르느라고 가슴팍이 오르내린다. 멜빈은 조용해진 아이작을 잠시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작업대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이따금 아이작이 어쩔 수 없이 애타는 소리를 냈지만, 멜빈은 아이작의 상태에 관해서 아예 관심을 껐다. 이런 접촉 없는 섹스도 두 사람이 종종 즐기는 건조한 섹스의 일환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리퀘스트 받은 것. 멜빈은 왼쪽도, 오른쪽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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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메에리웨더
:

암막 커튼이 창문을 단단히 가렸다. 실내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아서 온통 새카맸다. 깨진 화분과 망가진 잡화가 바닥에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고, 미아는 방 한구석에 몸을 구기고 앉아서 겨우 호흡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어떤 접촉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몸에 두른 담요를 부여잡고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썼다. 온갖 불안과 혼돈이 미아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그녀는 그 감각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몸을 웅크렸다. 끔찍한 것들이 그녀를 지나쳐가기를 바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미아는 아지트 곳곳에 몸부림친 흔적을 남겼다. 솟구친 감정 때문에 멋대로 발현된 능력은 덩굴이 바닥을 뚫고 피어오르게 했다. 덩굴은 바닥을 기어 벽과 가구를 타고 올랐다. 그녀는 울면서 선반과 테이블 위에 있던 물건을 내던지기도 했었다. 많은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았다. 미아는 기운이 빠질 때까지 그런 방식으로 불안을 떨치려고 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어떤 감정들은 몇 시간에 걸쳐서 그녀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분노와 슬픔, 혼란과 두려움. 그리고 알 수 없는 것들까지. 끝내 미아는 가장 비좁은 곳에 몸을 숨기고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 미아는 누구라도 좋으니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랐다.


문이 열린다. 온통 어두웠던 방 안으로 밤 거리에 머물던 은은한 달빛이 쏟아졌다. 탄야 랜킨은 눈 앞에 펼쳐진 난장판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느린 시선으로 내부를 살핀다. 그녀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일어나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장기 말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아서, 복잡한 일을 연이어서 맡기면 이렇게 고장 나버리는 약한 존재라고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발 앞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가볍게 구두 코로 치워버리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협탁 위에서 떨어지지 않은 전등이 켜지자, 실내가 조금 밝아졌다. 탄야는 곧장 미아의 방으로 향한다.


탄야가 미아의 앞에 섰다. 그녀는 쭈그려 앉아서, 미아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부드러운 손이 미아의 턱에 닿는다. 탄야가 미아를 매만지면서 속삭였다.


“시킨 일을 하러 나가지 않았다면서?”


미아가 고개를 들었다. 초췌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풀린 눈으로 탄야 랜킨을 응시했다.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미아가 몸을 편다. 생명줄을 붙잡듯이 탄야 랜킨의 양팔을 붙잡는다. 미아가 이윽고 다급하게 키스한다. 없던 공기를 들이마시는 호흡 곤란 환자처럼 탄야 랜킨에게 매달렸다. 빠졌던 힘을 어떻게든 끌어모아서 탄야 랜킨을 침대 위에 눕힌다. 옷과 살갗에 닿는 손길이 전부 급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탄야 랜킨의 몸을 더듬고 주무른다. 탄야 랜킨은 그런 미아를 거부하지 않았다. 비릿한 미소를 띤 채로 올려다보다가, 미아의 손을 붙잡고 자세를 고쳐주기까지 했다.


“얘야. 그렇게 떨고 있으면, 내가 도와줄 수가 없잖니.”


미아는 지금 눈앞의 탄야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언젠가는 탄야 랜킨이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장본인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아니,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미아라는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 미아에게 온기를 나눠주는 탄야 랜킨뿐이었다. 미아는 그래서 탄야 랜킨을 놓을 수가 없었다. 비좁은 간격 사이로 오가는 뜨거운 숨과 부드럽게 스치는 살결과 시선이 맞닿는 순간들. 그것들이 미아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했다. 미아가 갇혀 있는 사무치게 고독한 공간 속에서 그녀가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했다. 미아는 탄야 랜킨의 품속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을 맹렬히 드러냈다. 탄야 랜킨의 목덜미를 핥고 깨물어 흔적을 남긴다. 미아가 울음 섞인 목소리를 냈다. 탄야가 웃는다.


“사랑해, 탄야. 날 사랑해 줘…. 날 떠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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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퀘스트로 받았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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